고맙다의 어원
‘고맙다’의 어원 ‘고마’는 ‘신’ 또는 ‘신령’을 지칭하는데. 즉 ‘고마’의 형용사인 ‘고맙다’는 사람 이상의 존재에 대한 외경의 표현이며, 동사형 ‘고마워하다’는 ‘공경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글쓴이 : 천소영 교수(수원대 국문과, 〈우리말의 속살〉에서)
고맙다의 어원
‘고맙다’의 어원 ‘고마’는 ‘신’ 또는 ‘신령’을 지칭하는데. 즉 ‘고마’의 형용사인 ‘고맙다’는 사람 이상의 존재에 대한 외경의 표현이며, 동사형 ‘고마워하다’는 ‘공경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글쓴이 : 천소영 교수(수원대 국문과, 〈우리말의 속살〉에서)
지금으로부터 20여년 전인 1986년 영국의 뉴사이언스 과학잡지는 우주의 모든 별자리를 컴퓨터에 입력시키면 사람 모양을 하고 있다고 발표하였습니다.
즉, 사람 모습을 그대로 확대하면 우주의 모습이 되는 것이지요. 정말 신기한 일이죠? 물론 그냥 우연으로 치부해버릴 수도 있는 일이지만, 과연 우연으로 생각해버리고 말 일일까요? 예로부터 동양에서는 인간을 소우주라고 불러왔습니다. 인간은 대우주를 가장 많이 닮고 있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인간의 몸 속에 존재합니다.
인간을 이루는 물질은 그 기원을 따라 올라가면 우주 창생시의 기억부터 시작해서 현재 '나'라고 이름 짓는 현재까지의 기억까지 전부 누적되어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누가 그런 말을 했냐고요? 지금 제가 이렇게 새기고 있네요. ^^ㅋ).
물질이 그러하건데, 정신의 세계는 어떨까요? 정신은 과연 진짜로 우리가 죽으면 죽는 당사자와 함께 영원히 소멸되어 버리는 것일까요?
생각이란 무엇일까요? 뇌과학에서 얘기하듯이 과연 생각이란 것이 뇌 속에서 일어나는 전기화학적 신호에 불과한 것일까요?
하지만 실제 우리가 보고 느끼고 숨쉬며 살아가는 현상 세계는 그렇게 보잘 것 없고, 미미한 세계가 아닙니다.
오늘도 지구 안에서는 어느 곳에서는 전쟁을 하고 있고, 아마존 밀림의 수 많은 나무들은 반대편에서 전쟁으로 인해 숲이 파괴되고 사람과 생물이 죽어가고 있는 것과는 아무 관계없이 산소를 방출하고 있습니다.
바다 속, 강물 속, 숲 속의 생태계는 인간이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고 무슨 짓을 하건 아무 관계없이 먹고 싸우며 생태계의 그 거대한 흐름을 유지해나가고 있습니다.
오래전 그 생태계의 바깥쪽으로 벗어난 인류는 생태계를 마음대로 주무르고 있다고 착각하며 환경을 파괴, 개조하고 있습니다.
인류는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길을 걷기 시작한 걸까요?
대체 무엇이 인류를 생태계 밖으로 쫓아낸 것일까요?
바람 앞의 등불이 그러하듯이 한 순간 언제 피어올랐는지도 모르게 꺼져버릴 수도 있는 생명이라면, 방종은 그만두고 신이 만들어 둔 '생태계'라는 거대 순환 시스템 속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신을 믿으며 살라는 것도 아니고, 신이라는 무시무시한 존재가 우리를 주시하고 있으니 알아서 기어라는 말도 아닙니다.
어쩌면 신이 자신의 존재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인간에게 사고시스템을 주입시켜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자신의 존재성을 머리 속 저 깊은 곳에 심어두셨는지도 모릅니다. 만일 제 생각이 틀리지 않는다면 인간은 어쩌면 멸종은 피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방종스럽게 생활하며 신을 거역하고 신을 부정하는 짓은 그만둬야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세상에 그냥 저절로 존재하게 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자신은 하늘에서 어느날 갑자기 뚝 떨어진 존재인 듯 안하무인격으로 살아가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
그대들은 그대들의 부모님이 안 계셨다면 이 세상에 없는 존재입니다.
부모님도 부모님의 부모님이 안 계셨다면 역시 이 세상에 없는 존재입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시초엔 인류의 부모는 남자와 여자 딱 두 사람만이 남습니다.
그 남자와 그 여자를 기독교에선 '아담과 이브'라고 호명하며,
진화론에선 '암수 원숭이* 주1) 한쌍'이랍니다.
(창조, 진화 중 어느 쪽을 믿건 당신 마음입니다. 지금은 창조, 진화 얘기를 하자는 게 아닙니다.)
또다시 시간의 강물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아! 여기에 단세포 생물 하나가 갑자기 나타납니다.
다시 시침을 반시계 방향으로 한참을 돌립니다.
저 멀리 눈에 보일 듯 말듯한 한 점 빛이 보입니다.
다시 시침을 반시계 방향으로 조금 더 돌립니다.
아무것도 보이지도, 아무것도 느껴지지도 않습니다. 아무 생각도 없습니다.
물질이 사라지고 세상이 사라지고, 이 우주 자체가 사라진 곳. 시간이 정지된 곳.
그 때 신은 깊디 깊은 영겁의 시간을 잠 속에 빠져들어 있었습니다.
갑자기 신의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램수면 상태인가 봅니다.
아하! 신이 영겁의 시간 속에서 이제 막 꿈을 꾸기 시작했나 봅니다.
그 순간
저 멀리 눈에 보일 듯 말듯 한 한 점 빛이 보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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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꿈 속에서 어떤 한 사내가 컴퓨터 모니터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타이핑을 하려는지 키보드에 손을 올려놓은 모습입니다.
영겁의 잠 속에 빠진 신은 마치 자신이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다는 느낌이 일순간 듭니다.
신이 꾸는 꿈 속의 그 사내는 신이 자신에게 이렇게 타이핑하게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으며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합니다.
지금으로부터 20여년 전인 1986년 영국의 뉴사이언스 과학잡지는 우주의 모든 별자리를 컴퓨터에 입력시키면……
윗 글을 유추해보면 꿈이란 시간의 연속선이 영속되지 않고, 한정된 시간 안에서만 현실로 느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만일 어떤 한 사람이 영원히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끝없는 잠 속에서 끝없이 꿈을 꾼다면 그 사람에겐 ‘꿈=현실’이란 등식이 성립한다고 봐도 무방한 것 아닐까?
꿈이라는 것을 현실이라는 시간의 연속성이 깨어진 상태라고 가정한다면, 꿈에서 깨어난 상태인 현실이란 것도 어쩌면 시간의 연속성일 뿐인 것은 아닐까?
연속적인 경험을 우리의 뇌는 ‘실재’(한다)라고 결정 짓는 것일지도 모른다.
만일 실재와 비실재의 차이가 ‘시간’이란 인자뿐이라면 우리의 뇌가 결정한 실재라는 것도 더 넓은 영역(차원)의 일부일지도 모른다.
흔히 깨달았다는 선승이나, 신비체헙을 얘기하는 영지주의자들이 본 ‘실재’라는 개념이 어쩌면 우리가 현실이라고 믿는 테두리를 한단계 넘어선 또다른 ‘실재’를 경험한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일상적인 관념의 세계와는 무관하게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의 틀 안에서는 ‘우주의 끝’이란 개념은 착각에 불과하듯이 우리의 뇌는 현실이라는 틀 안에 갖혀서 ‘실재’를 규정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神이란 물리적 실재계를 넘어선 세계의 존재이다. 우리의 뇌가 인지할 수 없는 방식으로 내면에 깃들어 우리를 주시하고 있는 존재이다.
불교의 깨닫는 방식 중에 ‘돈오’라는 것이 있다. ‘돈오(頓悟)’란 갑자기 깨닫는다는 뜻이다.
“찾으려하면 찾지 못할 것이요, 찾으려는 노력 조차 끊긴 찰나, 그 부지불식간에 깨달음이 오듯이”
우리 내면의 神이란 절대자도 부지불식간에 우리의 내면에서 그 빛을 발하는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