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3월 29일 일요일

아무도 모른다2

[자살한 연예인들]


착각하기 싶지만 삶의 다음에 순차적으로 죽음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생명은 죽음이란 거대한 틀 속에서 삶이라는 찰나를 만끽하는 것이다.
삶이란 그렇게 찰나에 불과하기에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찰나에 불과한 삶이기에 자살을 선택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잊지 말아야 한다.
삶은 그렇게 긴 것도 아니고, 즐겁기만 한 것도 아니지만 살아 있는 한 꾸역꾸역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피곤하다고, 지친다고, 지겹다고, 삶에 의미가 사라졌다고 해서, 자신의 생명이라고 해서 스스로 죽음의 강에 발을 넣으면 안되는 것이다.

신이 있거나 말거나,
죽음의 다음에 또 다른 삶이 있거나 말거나,
천국과 지옥이 있거나 말거나 그건 살아서는 아무도 모른다.

만일 생명이란 것이 단 한 번 뿐이고, 죽으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것이라면 너무 아깝지 않은가?
아무리 피곤하고 지치는 삶이더라도 찾아보면 틀림없이 재미 있는 일 한두 가지 정도는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난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살아가고 있다.
그러니 당신도 살아!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어때!
때로 꼴지가 되면 어때!
사는 게 좀 허무하면 어때!
돈이 좀 궁핍하면 어때!
사람들이 나를 몰라주면 어때!
왕따 좀 당하면 어때!
사람에게 실망 좀 하면 어때! 라고 생각하며
살아가야 할 의미를 찾아가는 삶.
삶의 의미 따위, 설령 죽는 순간까지 찾지 못하더라도 어때! 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어차피 죽음이라는 불치병에 걸려 있는데,
그래서 우린 죽음이라는 그물망에서 영원히 빠져나올 수 없는 것이잖아.
죽음은 만민평등이잖아! 뭘 그렇게 서둘러…….
그러니 스스로 선택하지마! 죽음 따위.

17세 때 이미 자살을 꿈꿨던 자가 할 말은 아니지만,
나 자신에게 채찍질한다. 이랬거나 저랬거나 살아야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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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의미없는 삶일지도 모른다.
아니,
삶에 특별한 의미 따위 붙힐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말로 자신의 삶에서 내일이라는 시간이 다시 오지 않는다는 통고를 받는다면,
그래도 오늘 하루가 그렇게 무의미하게 흘러갈까?
그래도 정말 한 순간 스쳐지나가는 모든 것들이 무의미하게만 느껴질까?

삶 따위 어떻게 되던 관계없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아니, 지금의 내면 어딘가엔 분명히 아직도 그 의식이 잔뜩 웅크리고 있다.
그리고 그 의식은 죽는 그 순간까지도 내면 저 깊숙한 곳에 숨어서 가끔 나를 괴롭힐 것이다.

삶에 의미 따위 아무것도 없는 것이며,
하루하루가 지옥일지라도,
스스로 죽고 싶지는 않다.
죽음 따위 무서워서가 아니다.
살고 싶은 이유 따위 없듯이
죽고 싶은 특별한 이유 따위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즐거우면 더욱 더 즐거울 꺼리를 찾듯이
괴로우면 괴로움을 즐기면 된다.
슬픔과 고통을 감내하자는 것이 아니다.
어떤 바보가 슬픔과 고통을 감내하겠는가.

이 세상은 어떻게 돼 먹었는지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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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찰나에 불과한 낙(樂)과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고(苦)의 연속이다.
우린 그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신의 잘못은 더욱 아닐 것이다.
다만, 그렇게 이어져왔고,
틀림없이 영원히 세상은 유토피아와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계속 달려갈 것이다.
어쩌면 삶이란
신이 인간을 위해 준비해놓은 유토피아(천국 혹은 극락, 뭐라고 이름 붙히던...)로 가기 위한 관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너와 닮은 거울상인 또다른 사람들이 오늘을 살아간다.
뉴욕에서, 도쿄에서, 런던에서, 파리에서,
그리고 서울의 한 모퉁이에서…….

| 너스레 |
삶 따위 의미가 있건 없건 괘념치 않고 살아가기로 결심한, 사람 여기 있다.
네 바로 곁에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너를 꼭 빼 닮은 사람이 있다.
그러니 자살 따위 생각하지 말고 당신도 살아.
열심히 살기 싫으면 게으름도 피우며 살아.
네가 게으름 피우고 싶은 만큼 피우고 살아.
그런다고 세상이 어떻게 되는 것도 네 삶 전체가 어떻게 변하는 건 아니니까.
세상에 영원한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할 만큼 해봐.
게으름도 언젠가는 지겨워질 날이 분명히 있으니.
세상에 태어나 뭐 한 가지 원하는 만큼 해보지 못한 인간이 뭔들 제대로 할 수 있겠니.
설령 그것이 게으름이라도 피울려면 제대로 피워봐!
그리고 하늘이 부르는 날 까지
당신도 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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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11 - [생각의 우물] - 6907, 8612, 10897, 11491, 12010, 10652, 12174

2009년 3월 23일 월요일

휴대폰 메모에서 발견한 나 #1

휴대폰 메모장을 뒤적이다. 때때로 일상 속으로 스며든 상념의 단편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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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페이퍼로 꾸며보다]

휴대폰 메모장 #1
공간과 시간에 대한 감각이 없었다.
과거와 미래도 없었다.
시공을 초월한 무한과 영원 속에 나는 떠 있었다.
그리고 우주 전체가 큰숨을 쉬었다가 내뱉는 것처럼 느껴졌다.
우주의 호흡 하나하나가 신이라고 생각했다.
새긴 날:2008년 9월 25일(목) 오후 8시 36분

§ 저자가 누구였지? 내 글은 아닌 듯한데? 이차크 벤토프였나? 프리초프 카프라였나? 기억이 미아가 됐나보다……. 헌데, 야밤에 대체 무슨 생각을 하며 새겨둔 걸까?


구글에서 찾은 웰페이퍼의 원본 이미지 두 장(저작권은 누군가에게 있겠죠. 하나는 NASA 것)





2009년 3월 18일 수요일

밥 로스의 그림을 그립시다:시즌 19

PDA용 동영상 입니다.
클럽박스의 PDA 전용 영화관 http://clubbox.co.kr/june586 에 가입하시고 다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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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ies 19


Bob Ross - The Joy of Painting 시리즈 19 - 각 회 완성도 캡춰 화면
각 그림을 클릭하시면 실제사이즈로 볼 수 있습니다. 13회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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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편 [Snowfall Mag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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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편 [Quiet Mountain La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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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편 [Final Embers Of Sunl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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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편 [Snowy Mor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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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편 [CamperS Ha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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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편 [Waterfall In The Woo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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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편 [Covered Bridge Ov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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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편 [Scenic Seclu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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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편 [Ebb Ti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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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편 [After The R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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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편 [Winter Eleg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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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편 [EveningS Pe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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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편 [Valley Of Tranquility]
인코딩 툴 : 바닥
사이즈 : 320 x 240
화질 비트레이트 : 264~360사이
2Pass : Y
즐감하세요.^^

2009년 3월 16일 월요일

화성에서 사는 대통령 금성에서 사는 국민

※ 아랫 글은 어느 사이트 유머란에 있는 글이다.
제목:남자와 여자의 대화
띠리리리~ 띠리리리~ 따르르르릉~~

남자 「여보세요~~ 」
여자 「오빠 자동차 시동이 안 걸려」
남자 「그래? 배터리 나간거 아냐? 라이트는 켜져?」
여자 「어제까지는 제대로 됐는데. 왜 갑자기 시동이 안 걸리지?」
남자 「엔진 트러블이면 곤란한데. 일단 배터리 문제인가부터 확인해 봐. 라이트는 들어와?」
여자 「아이 참, 나 오늘 OO까지 가야되는데! 차 없으면 안 되는데...」
남자 「그거 큰일이네. 어때? 라이트는 켜져?」
여자 「아! 분명히 어제 탔을 때는 괜찮았는데, 히잉. 이 고물차! 이럴 줄 알았으면 차 안 바꾸는건데!」
남자 「라이트는 켜져? 안 켜지는거야?」
여자 「O시에 약속이니까 아직 시간은 있지만, 걸어서 가기에는 넘 멀어~」
남자 「그래. 그런데 라이트는 어때? 켜져?」
여자 「응? 미안, 잘 안 들렸어」
남자 「아, 뭐, 라이트는 켜져?」
여자 「왜?」
남자 「아, 시동 안 걸리는 거 아니야? 배터리 나가서 그러는 걸 수도 있으니까」
여자 「무슨 말이야?」
남자 「응?」
여자 「에?」
남자 「자동차 배터리 나갔을 수도 있으니까, 그거 확인부터 해보자구. 라이트 켜 봐」
여자 「그게 왜? 배터리 방전됐으면 라이트 안 켜지잖아?」
남자 「아니, 그러니까. 그걸 알아보려는 거니까 라이트 좀 켜 봐」
여자 「혹시 지금 화내고 있는 거야?」
남자 「아니 별로 화 안 났어」
여자 「화내고 있잖아. 왜 화 내?」
남자 「그러니까, 화 안 났다고」
여자 「뭐 내가 잘못했어? 말하면 사과할께」
남자 「괜찮아. 화 안 났어. 괜찮아, 괜찮으니까」
여자 「뭐가 괜찮은데?」
남자 「휴~ 아냐 배터리 말한거야」
여자 「차 이야기하는거야?」
남자 「아 그래, 차 이야기」
여자 「지금 차가 중요해? 」

위 글은 혹시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를 읽고 지은 얘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소통의 부재에 따른 짧은 부조리극.

| 화성에서 사는 대통령 금성에서 사는 국민 |
긁어 온 유머(?)를 기본 줄기로 해서 대통령과 정부에 대해서, 너스레를 떨어볼까 하고「화성에서 사는 대통령 금성에서 사는 국민」 이라는 제목을 붙혔다. 한참을 멍하니 모니터를 바라보다가 단 한 줄의 제목 속에 필자가 하고 싶은 말이  전부 농축되어 있다고 여겨져서 더 이상의 너스레는 떨지않기로 한다.
참으로 오랜만에 화룡점정한 느낌이다.

2009년 3월 14일 토요일

개미와 베짱이와 행복

| 행복에 대하여……. |

+ 행복해지고 싶은가?
그대가 정녕 행복해지고 싶다면
밥벌이를 위해서는 최소한의 시간만 쓰고
나머지 시간은 진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한다.
행복의 조건은 이것 외엔 아무것도 없다.
[윗 글은 누구였는지 잊었지만 어느 저명한 분의 말씀이었던 것 같다. 기억을 더듬어서 새겨 둔다. 홍세화 선생이었던가?? 음, 역시 기억력이 자꾸 감퇴되는 걸 보니 늙고 있는거야…….]

혹시 아직도 (남보다)많은 돈을 소유하는 것이 행복의 조건이라는 착각에 빠져 있는가?

그 착각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그대가 불치병에 걸리거나,
그대에게 죽음의 그림자가 성큼 다가와 있을 때,
그대에게 돈 외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것을 문득 느낄 때,
그대는 뒤늦게 깨닫게 될 것이다.
돈은 행복과는 아무 관계도 없었다는 것을.

바보 머저리 되지 않으려면 천민자본주의가 만들어 둔 기형적인 행복관에 휘둘리지 말아야 한다.

옛말에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쓴다'는 말이 있다.
천민자본주의의 전형적인 의식이다.

굳이 개처럼 벌지 않고도 정승처럼 살수 있는 방안을 제시해 주는 것이 교육과 교육자의 몫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는가?
왜 굳이 정승처럼 쓸려고 하는가? 서민으로 살면 큰 일이라도 나는가?
스스로에게 떳떳하면 됐지. 왜 굳이 남에게 폼나게 보이기 위해 정승 씩이나 되어야 한단 말인가?
모두가 정승처럼 살 필요도 없고, 모두가 정승이 될 수도 없고, 모두가 정승 같은 의식을 가질 필요도 없다.

적게 벌어도 밥굶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하며 살수 있다면 그게 바로 행복인 것이다.
노후 걱정 때문에 돈 모으고, 자식 위해 재테크하고, 남에게 뒤지지 않기 위해 잠 안자가며 돈벌고... 그러다보면 황혼이 된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나중에 정년퇴직 후에, 나중에 시간나면 하면 되지 않느냐...
웃기지 말라! 어느 누구의 인생에나 그런 널널한 시간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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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미가 좋아? 베짱이가 좋아?
놀고 먹는 베짱이가 되어서도 안되겠지만, 즐기지 못하고 일만하는 개미는 더 문제가 많은 것이다.

이솝우화의 '개미와 베짱이' 이야기는 가진 자와 지배층이 하위층을 부려먹기 위한 아주 유용한 본보기용 교재에 지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인생을 살아가다 부딪히는 제반 문제는 전부 개개인의 선택의 문제이다. 이건 변하지 않는 진실이다. 그러므로 '개미와 베짱이' 우화를 어떤 식으로 해석하느냐도 개개인의 선택의 문제일 뿐이다.

필자는 베짱이도 되고 싶지 않았지만 일만 해대는 개미는 더더욱 되고 싶지 않았다.

너무 뒤늦게 깨달은 것이지만, 학교라는 곳에선 암묵적으로 일개미들을 대량으로 만들어내고 있다. 적어도 이 나라에서는...

잘 먹고 잘 살게 해주겠다고…….
잘 먹고 잘 살기만하면 자동으로 행복해지디?
웃기고 있네. 하품난다 -.-+


| 학교란 대체 우리에게 무엇인가? |

우리에게 학교라는 시설은 경쟁해서 이기지 않으면 남보다 잘살 수 없다는 말도 안되는 억측으로 뒤범벅된 내면적인 전쟁터이고, 급우는 더이상 친구가 아니라 가장 가깝게 있는 '적'이다. 이런 의식은 필자가 중고등학교를 다니던 30여년 전 아니, 멀게는 우리의 선배들 시절이나 지금이나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도대체 어쩌면 그렇게나 일관성이 있는 지 신기할 따름이다.

『쓸만한 부존자원이라곤 없는 나라. 그래서 인적자원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마지막 보루인 나라』 이런 말 같지도 않은 논리적 오류에 근거한 억측 혹은 핑계거리가 어느 누군가의 꼴통 속에서 처음 나온 것인지는 모를 일이지만, 과연 인적자원만 있는 나라라고 해서 꼭 서로 경쟁해서 이겨야만 살아남는 것일까? 서로 도우며 공존할 수 있는 방안도 있지 않았을까? 현대 사회가 왜 굳이 경쟁 사회가 됐을까? 경쟁 사회라는 의식의 출발점 자체가 잘못된 출발점이 아니었을까? 나타난 현상(사실)이 그렇다고 해서 맹목적으로 그 현상에 따라서 가야만 하는 것일까? 왜 대안은 생각하지 못하는 것일까? 지난 날 맑스와 엥겔스가 이미 공존의 방안을 모색하고 그들의 생각을 실현하려고 노력해왔다는 것을 모르는 바도 아니고, 그들의 인류공존의 방안에 문제점이 있다는 것도 안다. 그들이 꿈꾸던 유토피아적 이상사회의 이념은 잘못된 것이 아니었다. 다만, 인류의 보편적 인식이 이론에 따를 만큼 성숙해 있지 않다는 것이 문제이며, 인류공존에 대한 보편적 의식이 코페르니쿠스적 대전환을 이루지 않는다면 맑스가 꿈꾸던 인류공존의 르네상스는 말 뜻 그대로 「유토피아적 환상」에 머물 수 밖엔 없을 것이라는 것은 당연귀착일 것이다.

+ 경쟁의식의 뿌리는 무엇일까?
혹시 경쟁의식도 멀게는 다위니즘의 '도태', '자연선택'라는 의식이 내면에 각인된 결과가 아니었을까? 다윈은 왜 공생이라는 훌륭한 관점은 생각하지 못하고 표면적으로 드러난 '도태', '자연선택'의 관점에서 생명 현상을 바라보게 됐을까? 어쩌면 이건 다윈의 의식의 착오이기 이전에 인류의 머리 속에 있는 '사고의 오류'는 아니었을까? 정말 꼭 이겨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일까? 과연 생명계라는 것이 싸우고 이기는 시스템으로만 유지되어 온 것일까? 자연계에서 벌어지는 현상을 보면 경쟁도 분명히 있지만 전혀 다른 종이면서도 공생하며 살아가는 생명체들도 얼마든지 있지 않은가? 자연계에는 경쟁과 공생. 두 가지 시스템이 항시 함께 있어왔는데, 왜 굳이 경쟁시키려는 의식만이 지배적인 것일까? 인류의식의 한계일까? 아니면 공생공존보다는 경쟁이 쉬운 길로 보이기에 선택한 것일까? 과연 공생공존보다 경쟁이 쉬운 길일까?

+ 두려움이라는 이름의 경쟁의식!
경쟁은 어쩌면 두려움이 그 근원일지도 모를 일이다. 뭐가 그렇게 두려운 것일까?
죽음, 기아, DNA속에 각인된 종족보존 본능 때문인가? 무엇이 됐건 경쟁은 더럽고 추잡스럽고 저급한 의식일 뿐이다. 자자손손 대대로 먹을 걸 벌어놓고도 모자라서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열심히 거둬 들인다. 대체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걷어들이는지 자신들도 잊어버린 채 그냥 습관적으로 혹은 욕망의 노예가 되어 거둬들이고 있는 건 아닌가? 자신에게 남는 것을 사회에 환원할 줄 모르는 자는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바보 머저리들이다. 앞 날이 어찌 될지 몰라서 꿰차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이미 우리의 앞 날은 전부 예정되어 있다. 잘난 인간이나 못난 인간이나 가진 자나 못 가진 자나 전부 모조리 싸그리 죽는다. 죽음이라는 앞 날은 생명있는 모든 것들에게 예정되어 있는 자연의 약속이다. 당신이나 사랑하는 당신의 자식이나 우리 모두의 후손들은 전부 죽음이라는 불치병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어느 땐가는 당신이 걸머지고 있는 그 물질이, 돈이 당신 자손의 어느 대에서는 반드시 사회로 환원되게 돼 있다(부자 3대 못 간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리라). 어차피 영원하지도 않을 물질, 몇 대 더 연결되면 무얼 한단 말이냐? 그 욕망의 연결에 무슨 특별한 의미라도 있단 말인가? 스스로 생각하기에 정말 한심스럽지 않은가.

이미 지나간 옛 영화지만 필자의 집안도 평양에서 내노라 하는 갑부였다. 하지만 일제시대와 육이오 동란, 1,4후퇴라는 역사의 흐름을 거치며 지금은 서민 그 자체이다. 불과 100년도 안 된 예전에는 한 지방의 유지였는데, 지금은 서민이라니. 요즘 식으로 표현하면 상위 2%라는 고위층에 속했다가 서민으로 전락한 것이다. 물질이란 그런 것이다. 언제든 사라질 수 있는, 허망하디 허망한 것이다(부자 3대 못 간다).

+ 경쟁이라는 내면의 괴물
경쟁. 이런 더럽고 천한 의식, 짓밟고 살아남아야 한다는 전제조건하에 세상에선 악행이 저질러지고 있다. 이 전제조건의 저변엔 위정자와 지배층의 경제부흥이라는 의식이 조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의식을 나오게 한 기반은 살려는 욕구였을 것이다. 침략당하고 지배당하고 착취당하며 살아 온 역사의식이 비정상적으로 변질되어서 경쟁에서 이겨내야 한다는 잘못된 비상구를 선택한 것은 아니었을까? 치욕의 일제시대에서 벗어나, 육이오 동란을 거치며 우리 민족의식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시대의 선각자 분들의 의식(그 시대 대중의 보편의식과도 맞닿아 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이 그 시대가 부른 당연지사였을지 모른다. 하지만 척박한 시대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한 역사의식이 충분히 검증되지 않은 자본주의와 성급하게 결탁하고 변질되어서 '경쟁의식이라는 내면의 괴물'을 키워낸 것은 아니었을까. 이 괴물이 변질되고 부폐되어서 IMF, 황금만능, 권력남용, 갖가지 좋지 않은 사회 현상 등으로 고름이 터지 듯이 나타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괴물은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천민자본주의 의식이 사라지지 않는 한 계속될 의식일 것이다. 지금으로선 어느 누구도 올바른 비상구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국민의 보편의식이 환골탈태를 한다면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 학교의 기능이 어쩌다가 지식경쟁만하는 전쟁터가 되어 버렸을까?

도대체 이 나라가 어쩌다가 이런 천한 교육정책으로 전락해버렸을까?
누구의 잘못인가? 정치인들만의 잘못이라고 손가락질 하지 말자!

우리들 각자 내면 속에 깃든 천민의식이 천민교육을 만들고 있다는 자명한 사실을 외면하지 말자!

서로가 함께 공존할 생각은 않고, 친구고 이웃이고 전부 짓밟고 나 부터 살고 보자는 저급한 의식을 버리지 않는 한 이 아비규환은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현대 사회가 나 혼자만 잘 된다고 해서 제대로 굴러가는 시스템인가? 정말 할 소린 아니지만 바보들인가?

당장 쓰레기 치우는 청소부들이 딱 한달만 파업한다고 생각해봐라! 이 세상은 거대한 쓰레기통이 된다. 쓰레기통 지구호! (정신적으로는 이미 그렇게 되어가고 있지 않나?! -.-;)
스스로 잘난 줄 착각에 빠진 정규직 사무직 분들, 공장에서 물건 만드는 분들이 2,3개월만 일손을 멈추면 당신들은 그 2,3개월 동안 아무 것도 할 일이 없어진다. 바로 백수되는 거다.
집안에서 일하는 주부들이 단 일주일만 파업한다고 생각해보라. 집안은 분리 수거도 안 되는 쓰레기통이 되고 만다.
…… 더 이상의 예는 필요치 않을 것이다 ……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혼자만의 힘으로는 살아갈 수 없는 족속들이다. 현대 사회인은 모조리 타인과 맞물려져야 제대로 돌아갈 수 있는 톱니바퀴와 같다.
현대 인류문명은 톱니바퀴문명이다. 그 톱니바퀴 가운데 단 하나만 잘못 돼도 원활하게 움직일 수 없는 시스템이다.
스스로 잘났다고 착각에 빠진 족속은 자신 보다 못 나고 가진 것 없는 자를 비웃고 손가락질 해대지만, 그 비웃음과 손가락질은 결국은 거울을 보며 스스로에게 하는 짓이나 진배없다.

+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진실

이런 생각의 부스러기들은 필자가 굳이 이렇게 성토하지 않아도 이미 우리 모두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다만, 우리 내면의 욕망이라는 이름의 기생충을 스스로 죽일 수 없다는 자괴감에 빠져 있을 뿐이리라.
몸 안의 기생충은 가만히 두면 저절로 소멸하지 않는다.
약을 먹어서라도 죽여야 하는 것이다.
정신의 기생충을 박멸하는 약은 이미 당신 속에, 그리고 내 속에 우리 모두의 마음 속에 이미 그 분께서 준비해두셨다.
양심이라는 이름으로...

+ 회상
돌이켜 생각해보면 중학교 이래로 어느 선생님도 공존의 미덕에 대해서 진심으로 상기시켜 준 분은 단 한 분도 없었다. 전부 『네 옆의 친구는 친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경쟁상대이다. 사람은 경쟁할 대상이 있으면 더욱 힘을 낼수 있는 것이다.』라는 의식만을 주입시켜줬다. 그 의식이 '교사지침서'에 적혀있는 교육부의 지침이었는지, 선생님들 개개인의 의식이었는지는 나로서는 확인할 수 없는 일이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근 30여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그 의식이 내 머리 속에 각인되던 때마다 온몸에 벌레가 기어다니는 것 같던 그 스멀스멀한 느낌은 지워지지 않는다. 기분 더럽다!

이 세상 그래도 살아갈 만한 가치가 있기나 한 걸까? 세상이 이 모양 이 꼴로 돌아가는데도 나만 행복하면 그 뿐이라 생각하는가? 혼자서만 잘 살믄 뭔 재민겨! 네 이웃, 네 친구, 네 형제자매, 넓게는 인류 모두가 함께 웃으며 살아갈 수 있는 방안은 정말 애초에 그 분께서 준비해두지 않은 것일까? 만일 정말로 '공존'이 인간에겐 사치라면, 그래서 에덴 동산도 유토피아도 꿈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라면, 나 같은 경쟁을 싫어하는 부류는 다윈의 생각대로 자연선택에 의해 '도태'되어야 마땅한 족속이 되는 것인가…….


+ 줄이며

도무지 생각의 끝이 보이지 않아서 너스레는 그만 떨어야 할 것 같다. 난 아무래도 내가 소망하는 평범한 서민으로 살긴 틀린 것 같다. 무슨 잡된 생각이 이리도 많이 드는 지, 나 원참!
아무래도 블로그 제목을 '화룡점정'이 아니라 '망상백과'정도로 바꿔야 할 듯…….

2009년 3월 12일 목요일

안개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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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속에서
                            - 소니 作

실체는 보이지도, 볼 수도 없었다.
안개 자욱한 별세계(別世界)의 꽃들의,

안개 속에서 시간은
흐르지 않았다.

시간은 안개 속에 갖혀
전율하며 끝없이 헤매일 뿐
안개 속에서의 시간은
여름 날 말벌의 현기증

세상살이도 그러하거니
바른 길도, 비상구도 없었다.
다만, 길 찾는 나그네
몇몇과 나그네 기다리는
망부석들만 있을 뿐이었다.
길 떠나 나그네는
영원히 돌아올 수 없고
기다림에 지친 이들은
안개 속에 묻혔다.

정지된 시간
닫혀진 공간
안개 나라에서 본 것은
떠도는 영혼과 기다림에 지쳐
돌이 된 망부석 뿐이었다.
안개 나라에서는
돌아오는 자도 반기는 자도 없었다.

흐릿한 안개 너머로 너울거리던 것은
내 모습일지도 모른다.
지금도 아련한 것은 그곳에서 나는
나그네였을까?
망부석이었을까?

안개 자욱한 별세계(別世界)에
점·점이 바람에 너울거리는
안개꽃을 닮은 사람들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찾아 헤매이는
그들에게서 나의
이면(裏面)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