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2월 31일 월요일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 [★★★★☆]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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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 - Veronika decide morrer
지은이:파울로 코엘료
옮긴이:이상해 옮김
출판사:문학동네
출간일:2003년 10월 10일
책정가:8,500원
책크기:B6/양장 (131.93x192.71x20.32mm)
페이지:303쪽
ISBN:8982817425

| 책 소개 |
시적이며 철학적인 문체, “머리가 아닌 마음에 속삭이는 상징적인 언어”로 높이 평가받는 브라질 작가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 10대 후반에 수차례 정신병원에 격리수용된 적이 있는 작가의 여성적 자아가 담긴 이 소설은 죽음 앞에 선 인간의 광기와 생에 대한 열정을 다룬 작품으로, 「연금술사」「다섯번째 산」과 같은 코엘료의 다른 작품들이 전세계적 반향을 불러일으킨 것과 마찬가지로 출간 3주 만에 프랑스에서 베스트셀러 1위로 오르기도 했다.

스물네 살 베로니카는 원하는 것은 모두 가지고 있는 듯. 젊음, 아름다움, 매력적인 남자친구들, 만족스런 직업,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 하지만 도전도 모험도 열정도 없는 일상에 빠져 인생의 꿈을 잃어버린 베로니카는 1997년 11월 21일, 지리멸렬한 삶을 버리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그녀가 네 병의 수면제를 삼킨 후에 눈을 뜬 곳은, 죽음의 세계가 아닌 정신병원 ‘빌레트’였다. 죽음 대신 그녀에게 주어진 것은 일 주일 남짓한 생의 시간.

그녀는 빌레트에서 ‘다른’ 사람들을 만난다. 제 몸 안에 든 한줌의 광기를 어쩌지 못해, 바깥 세상과의 끈을 놓아버린 사람들. 젊은 한때 미친 듯이 사랑했지만 이제는 어디에 살고 있는지도 모르는 한 남자 때문에 행복한 일상에서 돌연 지옥을 발견한 제드카, 유능한 변호사였지만 느닷없이 찾아온 광기의 첫 발작으로 일상 밖으로 내던져진 마리아 등이다.
 
| 저자 소개 |
파울로 코엘료
120여 개국 2700만 명 이상의 독자가 읽은 소설「 연금술사 」의 대성공으로 단숨에 세계적 작가의 자리에 올랐다. 이후「브리다」「피에트라 강가에서 나는 울었네」「다섯번째 산」「악마와 미스 프랭」「11분」등 발표하는 작품마다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켜 밀리언셀러 작가로 자리를 굳혔다. 그의 작품들은 55개국어로 번역되어 4700만 부가 넘는 베스트셀러를 기록했다. 작가는 2000년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으며, 유네스코 산하 ‘영적 집중과 상호 문화 교류’프로그램의 자문 위원으로 활동하는 한편, 브라질에서 ‘코엘료 인스티튜트’라는 비영리 단체를 세워 부인과 함께 빈민층 어린이들의 교육과 노인들을 위한 자선사업을 하고 있다.


| 책 표지 글 |
삶의 축복과 기적에 바치는 최상의 찬사,
영혼의 뒤흔드는 언어의 연금술!
생의 의미에 대해 탐구하는 우화의 대가 코엘료는「베로니카 …」에서 죽음 앞에서 되돌려 받는 생의 열정을 놀라운 실감으로 그려냈다.
– 독일 Der Spiegel

코엘료의 작품에선 페이지마다 진실한 문학적 향기와 깊은 인간적 풍취가 베어나온다. 「베로니카 …」는 코엘료가 왜 이 시대에 가장 사랑 받는 작가인지를 잘 설명해준다. – 콜롬비아 Periodico El Colombiano

놀라울 정도로 우리의 정신을 고취시키는 작품 – 영국 The Big Issue

코엘료 소설 중 최고의 원숙함과 감정적 충격을 느끼게 한다. – 이탈리아 Il Corriere Della Sera

우리가 정상이라고 알고 있는 것은 어쩌면 완전히 부조리한 것일 수도 있다. 카뮈나 사르트르를 떠올리게 하는 이 소설은 거듭 읽히며 찬탄받을 만하다. – 노르웨이 VG

파울로 코엘료는 하나의 세계적 현상이 되었으며 단순히 논리만 가지고서는 그가 미치는 영향력을 설명할 수 없다. 코엘료의 소설 속에서 현시과 마법의 경계선은 사라진다. – 오스트리아 Profile
 
 
| 감상문 |
삶이 지루하다 느낀 적 있는가? 삶이 지루하게 느껴지는 것은 나이와는 무관한 것인가보다. 난 17세 때 처음 사는 게 왜 이렇게 지루하고, 허무한 것일까?에 대해 고민하고, 나 자신과의 내밀한 대화를 한 적이 있다. 그리고 그 이른 시절에 이미 자살을 꿈꿨으니... 어찌보면 난 참 인생이란 것의 정체에 대해, 나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너무 일찍 눈을 뜬 새였는지도 모르겠다. 왜 살아야 하는가?는 어쩌면 인류 공통의 질문인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떤 답도 얻지 못하고 그냥 살아보자!는 결심만으로 살아갈 것이고, 어떤이는 나처럼 종교에서 답을 얻고서(내 경우엔 솔직히 얘기하자면 아직도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 있다.) 영혼의 안정을 찾기도 한다. 또다른 소수의 어떤이는 그 질문에 대한 답없음에 대한 허무감의 무게에 짓눌려 결국 운명을 달리하기도 한다.

예전에 잠시 알고 지낸 여인네가 자살을 몇 번 시도한 경력이 있다고 했다.
나 : 왜 죽으려고 했냐고 물었더니, 그 여인네 말하길...
여인네 : "하루하루 다람쥐 쳇바퀴 같은 시간들이 너무 지루해서"... 라고
나 : 지루하니깐 취미생활도 하고, 사랑도 하고, 운동도 하고, 술도 마시고... 모두 지루함을 잊기 위해 그렇게 반쯤 미친 듯이 살아가는 것 아니겠냐?
여인네 : 그런다고 지루함이 사라지디?
나 : (뭔가 망치에 한방 맞은 듯이 멍~해져선 대꾸를 못했다)...
(한참의 침묵이 흐른 후)
여인네 : 저기 저렇게 '난 사는 게 참 재밌다'는 듯이 웃고 있는 저 사람들도 이미 죽은 사람들 많을 거야.
나 : 저기 저렇게 살아있는데 죽은 사람들이라니?
여인네 : 마음이 죽은 사람들 말이야. 몸만 살아가는 빈 껍데기들. 나처럼...
나 : 아!...

몇 년의 시간이 흐른 후 그녀의 친구의 입을 통해 결국은 그녀는 자기 의지로 삶을 접었단 얘길 전해들었다.
난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이미 그녀 자신이 내게 죽은 사람이라고 선언했고, 난 그 말의 의미를 충분히 가슴으로 받아들였기에...

가끔 한여름의 무더위처럼 시간이 늘어질 때면 자살을 꿈꾼다. 그때면 내 존재의 무게에 그녀의 마음의 무게까지 더해져 꼼짝을 못한다.

어찌보면 진부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소설 속의 한 대목이 마음에 꽂혔다.
「남자와 여자가 세상에서 할 수 있는 가장 미친 짓은 사랑이야!」
그때 내가 이런 멋진 말 한마디라도 생각해내서 그녀의 마음에 새겨줄 수 있었다면, 그녀는 지금 살아있지 않을까? 비록 몸뚱이 일지언정... 근데 그녀는 아마 그래도 죽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고뇌를 대체 뭘로 채운단 말인가...

사람은 각자 나름의 살아갈 이유를 만들어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지만, 사실 알고 보면 자살이나 진배없는 삶도 부지기수로 있을 것이다.

어쩌면 산다는 것과 죽는다는 것은 이음동의어일지도 모른다.

불꺼진 빈 방에 홀로 앉자서 멍하니 가물가물한 어둠을 배회하며, 이런 저런 상념에 빠졌다가 무심코 컴퓨터에 전원을 넣었을 때, 하드 드라이브 돌아가는 소리가 문득 심장 소리로 느껴졌다.

지루함을 극복해보려고 영화「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를 다시 보고나서 끄적여놓는다. 지루함이 약간은 사그러든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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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별점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 Veronika Decides to Die (2005) 

2007.03.23 개봉 / 18세 이상 / 107분 / 드라마 / 일본

 

· 감  독

호리에 케이

· 출  연

마키 요코(토와), 이 완(클로드), 후부키 준(쇼우코), 나카지마 토모코(사치), 유미 다키가와(교오코)

· 공식홈페이지

http://kadokawa-pictures.com/veronika/ (국외)

· 헤드카피

모든 걸 다 가지고 있지만, 아무것도 없으니까...
파울로 코엘료 원작

모든 걸 가지고 있지만, 아무 것도 없다

안정된 직장, 친구들과의 화려한 파티, 멋진 남자친구…
누구나 누리고 싶어하는 편안하고 안정된 삶을 보내던 토와(마키 요우코)는 어느 날 갑자기4병의 수면제를 삼키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한다.
짧은 유서를 유리병에 담아버린 채…
"세상에서 가장 싫은 나에게…"

당신에게 남은 생명은 앞으로 7일

토와가 눈을 뜬 곳은 정신병자들을 관리하는 한 요양소.
피곤에 찌든 모습의 원장이 흐트러진 머리를 손으로 넘기며 그녀에게 앞으로 7일밖에 남지 않은 '시한부생명' 임을 통보하지만 반복된 지루한 삶에 염증을 느끼는 토와에게는 아무런 감흥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요양소 안에서는 특이한 인간들이 독특한 세계에서 매일을 보내고 있다. 이상과 현실의 틈바구니에서 자신을 몰아세우고 있는 전직 변호사 쇼우코(후부키 준), 사랑에 너무 깊이 빠져 균형감각을 잃은 주부 사치(나카지마 토모코), 완치 후에도 광기의 세계에 안주하려고 하는 왕년의 대 스타, 그리고 그들을 지켜보는 간호부장의 모습도 평범하지만은 않다.

주변 사람들은 토와를 자극시키지 않으려고 접촉을 최대한 피하지만,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꿈을 이룰 수 없어 말을 잃어버린 클로드(이완) 만은 토와에게 어떤 공감을 느끼고 있었다.

누군가 진정한 나를 받아줘

요양소 사람들의 자유분방한 생활에 당황하고 혼란스러워 하던 토와도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진정한 자기안의 욕구에 충실하지게 되는 자신을 발견해 나간다.

인생에 있어 처음으로 자신을 인정하고 사랑할 수 있게 된 토와를 스쳐 지나가는 만남과 이별들. 눈 앞으로 닥친 죽음을 계기로 지루하기만 했던 토와의 인생이 빛을 발하기 시작하지만…

2007년 12월 28일 금요일

부제 서품식을 다녀와서…

거룩한 사제직을 위한 첫 관문을 통과하는 부제로 서품되는 조카를 위해 나름 정성껏 기도를 올리고서 잠자리에 누웠는데, 이런 저런 상념에 젖어들다보니 새벽 2시가 넘어서 잠에 들었다.
새벽 5시에 잠에서 깨어 이른 식사를 하고서 서품식이 있는 성당으로 향했다.

천주교의 성직은 고난의 길이란 건 이미 사촌 조카 두 분이 먼저 사제가 되어서 그 거룩하고 힘든 직무를 수행중이기에  예전부터 너무나 잘 알고 있는 터이지만, 피가 조금이나마 더 땡겨서 그런지, 조카가 이제 부제 서품을 받는다고 하니, 마치 내가 부제 서품을 받는 듯이 기쁨에 들떠기도 하고, 한편으론 마음이 아리아리하기도 했다.

큰누님이나 큰매형께서 억지로 시킨 것도 아니고, 조카가 스스로 선택한 길이기에 크게 걱정은 되지 않지만, 험난한 가시밭길 걷는 조카의 인생길이 조금이나마 수월했으면 하는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인지상정이리라.

집안 사람들 어느 누구에게도 내색하진 않았지만, 나 또한 젊은 시절 한때 내 처지를 비관하며 방탕한 세월을 보내다, 한동안 평수사의 길을 걸을까 하는 고민의 시간을 거쳤던 적이 있다.

비록 그 생각은 집안과 나 자신의 위치 등 이런 저런 이유를 붙혀서 스스로 접어버렸지만, 오늘 따라 웬지 사제, 부제 서품식을 보고 있자니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이랄까 아쉬움이랄까 하는 게 가슴 속 저 깊은 곳에서 떠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큰누님이 내게 냉담자라고 꾸짖던 시절에도 난 항상 성경을 읽고 있었고, 성경 속에 스며있는 인간 사랑에 대한 예수님의 그 말씀을 나름대로 실천하며 살았었다.
먼 후일, 지금 보단 좀더 나이가 들어 누님과 내가 같이 늙어가는 시간이 되면, 그땐 TV 연속극 얘기를 주고 받듯이 편한 마음으로 신앙에 대해서 두런두런 얘기할 날이 올 것이다.

큰누님이나 조카나 집안 사람 모두들 내가 믿음과 종교 대해서 이렇게 고민의 시간을 갖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진보적인 성향의 종교관을 갖고 있기에 지금은 내색하지 않지만, 언젠가 내 신앙의 나무에 열매가 무르익을 때 즈음엔 가슴의 문을 열고, 조카 사제님들과 큰누님과 허심탄회하게 신앙에 대해 얘기하게 될 날도 있으리라 믿는다.

내가 온라인이건 실생활에서건 종교에 대해서 어느 누구와도 대화를 하지 않으려는 것은 어차피 나 자신이 설익은 감일 것이 분명하고, 또 기존 기독교 교리와 정면 충돌하는 면이 있는 등, 내 신앙관을 얘기했다간 틀림없이 삐져나온 돌이 정 맞는다고 된서리를 맞을 것 같은 생각이 중첩적으로 들어서이다. 집안에 괜한 분란 일으킬 것도 같은 우려도 든다.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고 했던가!
고교 1학년 때부터 성경을 거의 끼고 살아왔지만, 나는 아직도 예수님의 사랑과 구원의 메세지와 현실 세계의 괴리감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스스로를 설익은 감이라거나, 나름대로 세워 온 신앙체계 때문에 꿀딴지 숨켜두듯이 종교에 대한 나의 정체성을 집안 분들에게 숨겨온 것이 아니라, 성경과 현실의 괴리감을 어찌하지 못하여, 나를 숨기고서 나 스스로 냉담자 아닌 냉담자로 오인 받기를 바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근데 오늘 술도 안 취했는데 줄줄이 마음 속의 에러코드들을 왜 이렇게 주절주절대는 건지 모르겠다.

어려운 길에 첫 발을 디딘 조카의 앞 길에 가시덩굴이 많겠지만, 종교의 특질이 박해를 받으면 받을수록 더욱 그 힘이 커지는 것처럼, 가시덩굴도 또다른 힘을 주는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조카가 1년의 부제직 수행 중에도 이제 껏 그러했듯이 흔들리지 않는 신심으로 잘 버텨낼 것을 믿으며…….

내가 설익은 감이 아니었다면 사실 이런 얘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그냥 축하한다! 딸랑 이 한마디에 내마음을 모두 담아 얘기할 수 밖에 없었다.
조카, 누님 두 분 모두에게 미안한 마음만 가득합니다.

사진을 몇 장 찍어오긴 했지만, 생략 ^^;

2007년 12월 26일 수요일

행복(Happiness, 20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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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별점]



행복 Happiness (2006) 

2007.10.03 개봉 / 15세 이상 / 121분 / 멜로 / 한국

 

· 감  독

허 진호

· 출  연

황 정민(영수), 임 수정(은희), 공 효진(수연), 박 인환(석구), 신 신애(요양원 원장)

· 공식홈페이지

http://www.happiness2007.co.kr/ (국내)

· 헤드카피

사랑, 그 잔인한
변치 않겠다는 새빨간 거짓말




장면을 넘기며…
허진호 감독의 2001년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상우(유지태)의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는 대사가 귓전을 맴돌았다.

허진호 감독의 영화는 전부 봐왔는데,
'8월의 크리스마스' 이후 계속 하향 곡선을 그리는 것 같다.
어쩌면 '8월의 크리스마스'가 불후의 명작이어서 일지도 모르겠지만…….
정확히 평하자면 '외출(2005)'에서 급강하 했다가 이 작품으로 조금 상승한 것이지만…….

허진호 감독 멜로 영화(장편) 단평
8월의 크리스마스(1997) : 사랑은 아련한 추억
봄날은 간다(2001) : 사랑은 변하는 것
외출(2005) : 불륜 그리고 이해... 사랑은 없다?
행복(2006) :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
다음 작품에선 어떤 사랑의 변증법을 보여줄까?

2007년 12월 22일 토요일

지금 이 세계는 실재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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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도서]

보이는 세계는 진짜일까? - SF영화로 보는 철학의 물음들 ∥ 조용현 (지은이) | 우물이있는집
이성. 진리. 역사 | 원제 Reason, Truth and History ∥ 힐러리 퍼트넘 (지은이), 김효명 (옮긴이) | 민음사
나무 | 원제 L'Arbre des Possibles ∥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은이), 뫼비우스(그림), 이세욱 (옮긴이) | 열린책들

| 들어가며 |

20세기가 저물어갈 무렵 영화사에 한 획을 긋는 SF 액션 영화가 한 편 나왔다.
전세계 수 많은 사람들이 관람한 워쇼스키(앤디, 래리) 형제 감독이 내 놓은 매트릭스이다.
시리즈 전편을 아울러 이 시리즈 처럼 호평과 혹평이 난무하는 영화도 드물지 싶다.
영화의 흥행과 평에 대한 얘기를 하자는 것이 아니니, 이 문제는 다음에 기회가 닿으면 다시 포스팅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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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매트릭스 시리즈는 철학자 힐러리 퍼트넘의 저서 "이성·진리·역사"에 나오는 사상에 철학적 근간을 두고 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제 1장에 실려 있는 "통 속의 뇌 Brains in a vat"이라는 논문에 스며 있는 분석철학(퍼트넘의 철학을 '내재적 실재론*'이라고 함)이 그 근저이다.

"통 속의 뇌"에 대한 간추린 얘기는 일전에 좀 깊게 다룬 적이 있으니 페이지 아래의 태그를 참조하면 될 것이다.

프랑스의 소설가인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단편집인 「나무」에 보면 "완전한 은둔자"라는 단편소설이 한 편 실려있는데, 이 단편도 힐러리 퍼트넘의 "통속의 뇌"에 철학적 근저를 두고 있다.

"완전한 은둔자"의 내용을 짧게 피력하자면 이렇다.
구스타브 루블레라는 의학박사가 있는데, 언젠가 그의 아버지가 그에게 들려줬던 말(「네 안에는 모든 것이 다 들어 있다. 태어날 때부터 이미 그러했다. 네가 하는 일은 그저 네가 알고 있는 것을 다시 배우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이 마치 불교의 화두처럼 그의 머리 속을 떠돌다가 진짜로 뇌만을 남겨두고, 수 대를 이어서 '생각의 바다'속을 헤매이며, 생각만 하다가 그의 뇌가 그만  …… (스포일러성 문구라서 생략함) 되어서 생을 마감하게 된다는 어찌보면 허무의 극치를 보여주는 내용이다.

이 소설을 처음 접한 사람은 그 아이디어가 너무 쇼킹해서 신선한 충격을 받기도 했겠지만, 철학을 전공한 사람이나, 철학서를 많이 접해 본 사람들은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을 받기도 한다.
그도 그럴것이 "완전한 은둔자"는 힐러리 퍼트넘의 "통 속의 뇌"의 소설 패러디판이라고 보면 되기 때문이다.

한 철학자가 "상념의 바다" 속을 떠돌다 건져 올린 진주 같은 관념이 전세계인의 감동을 일궈낸 영화로 탈바꿈하기도 하고, 소설로 모습을 바꿔 우리들 곁에 친숙한 모습으로 다가온 것을 보면 새삼 세상을 바꾸는 것은 자본의 흐름도 아니고, 대단한 예술가의 예술 작품도 아니라, 힐러리 퍼트넘이나 완전한 은둔자 소설의 구스타브 루블레 처럼 책상머리에 가만히 앉자서 생각의 바다 속을 부유하는 철학자들이라는 생각이들기도 한다.


| 이 세계는 실재하는가? |
이 세계가 실재하는지 아닌지는 어떻게 알수 있을까? 물질문명의 황금기라고 해도 누구 하나 반박할 수 없을 것 같은 이 시대에 이런 질문은 자다가 남의 다리 긁는 얘기거나 봉창두드리는 소리로 들릴 수도 있을 것이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잘 살아왔고, 잘 살고있고, 틀림없이 앞으로도 잘 살 것이다.

'실재'에 대한 문제의 근원을 캐 들어가면 그 근원이랄 수 있는 큰 뿌리를 몇몇 개 발견하게 되는데, 그 중에서도 철학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고, 현대에도 지대한 영향을 알게 모르게 미치고 있는 이름과 맞부딪히게 되는데, 플라톤 Plato이란 인물이며, 단적으로 얘기하자면 '실재'에 대한 단 하나의 문제로 평생을 고민한 인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볼수 있다. 플라톤 핵심 사상인 '이데아 론'이 바로 지금 얘기할 화두인 '실재'에 대한 사상의 원뿌리이다. 플라톤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는 서양철학의 전반을 안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영국의 철학자인 화이트헤드는 "서양의 2000년 철학은 모두 플라톤의 각주에 불과하다." 라고 말했으며, 시인 에머슨은 "철학은 플라톤이고, 플라톤은 철학" 이라 평하였다).

- 이 세상은 그림자다!? : 플라톤의 이데아(Idea) 론과 매트릭스의 가상현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플라톤 사상의 정수 精髓)다. 이데아론을 한마디로 압축하기는 힘들지만, 굳이 줄여서 설명하자면,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Idea)는 근본적으로 영원불변하고 비물질적인 본질이고, 우리가 보고 감각하는 현실적, 시각적 대상들은 단지 이데아의 조악한 모사이거나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영화 매트릭스를 깊이 있게 본 사람은 위의 밑줄 친 부분이 예사로 보이진 않을 것이다. 밑줄 친 부분을 영화 매트릭스적으로 환원해서 다시 적어보면 아래와 같다.
우리가 보고 감각하는 현실적, 시각적 대상들은 단지 매트릭스가 만들어 놓은 가상현실 프로그램일 뿐이다.

영화 매트릭스 1탄에서 이데아론이 극명하게 그려진 부분이 있다.
매트릭스가 제공한 기나긴 꿈속 세상에서 네오를 끄집어낸 모피어스가, 네오에게 현실과 매트릭스가 만들어 둔 가상의 세계와의 차이점을 얘기해주는 장면이 나온다. 매트릭스의 개념을 설명한 부분이니 집고 넘어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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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피어스:이게 '컨스트럭트'일세. 로딩 프로그램이지. 뭐든지 로드(load)할 수 있어. 옷이든, 장비든, 무기든…… 훈련 시뮬레이션이든 필요한 건 모두 다.

네오:프로그램 안이라구요?

모피어스:그렇게 믿기가 힘든가? 자네 옷도 바뀌었고, 머리와 몸의 구멍도 없어. 머리 모양도 다르고. 지금 자네의 모습은 '잉여 자기 이미지'란 거야. 자신이 생각하는 모습을 디지털화한 거지.

네오:진짜가 아닌가요?

모피어스:진짜가 뭔데? 정의를 어떻게 내려? 촉각이나 후각, 미각, 시각을 뜻하는 거라면 '진짜'란 두뇌가 해석하는 전자 신호에 불과해. 이게 자네가 아는 세상이야. 바로 20세기 말의 모습이지. 이젠 매트릭스라는 신경 상호작용 시뮬레이션의 일부로만 존재하지. 자넨 꿈나라에서 살았었네 네오. 이 세계가 오늘날의 세계야. 환영하네. 여기가 진실의…… 사막이네. 우리도 확실히는 모르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인류는 21세기 초의 어느 시점엔가 스스로 경탄하며 AI의 탄생을 한마음으로 축하했다는 거야.

네오:AI라면……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

모피어스:기계들을 대량 생산해낸 단일 자의식이었지. 우리와 그들(AI에 기반을 둔 기계) 중 누가 먼저 공격했는진 몰라. 다만 인류가 하늘을 불태운 건 확실해. 당시의 기계들은 태양력에 의존했고, 에너지의 원천인 태양이 없으면 그들은 멸망할 거라고 믿었지. 인류는 생존을 위해 기계에 의존해 왔어. 운명이란 모순적일 때가 많아. 인체는 120볼트 건전지 이상의 전기를 발생하고 체열은 2만 5천 BTU가 넘어. 기계들은 핵융합과 결합하여 필요한 에너지를 얻었지. 끝도 없이 널린 벌판이야 . 인간은 태어나는 게 아니라 재배되는 거지. 나도 오랫동안 믿지 못 했어. 그러다가 직접 본 거야 죽은 자를 액화시켜 산 자에게 주입하는 걸. 끔찍하리만치 정확한 기계들을 보면서 난 명백한 진실을 깨달았지.
매트릭스가 뭘까? 통제야. 매트릭스는 컴퓨터가 만든 꿈의 세계야. 우릴 통제하기 위한 거지. 인간을 이것(건전지)으로 만들려고…….

네오: 아냐! 믿을 수 없어. 불가능해!

모피어스:믿기 쉽다고는 안 했어. 진실이라고만 했지.

네오:그만 해! 나가고 싶어! 나가게 해 줘!

트리니티:진정해, 네오.

네오
:빨리 뽑아! 뽑아 버려……. 날 만지지 마, 저리 가! 난 안 믿어! 안 믿는다구! 안 믿어

사이퍼:미쳐 가요.

모피어스
:숨을 쉬어, 어서!

… (네오가 기절한 후, 장면 전환) …

네오:다시 돌아갈 순 없죠?

모피어스:그래. 돌아갈 수 있다면 가겠나? ……
(39:31 ~ 44:43)


- 플라톤의 동굴의 우상
동굴의 우상은 원래 플라톤이 자기 학설을 설명하기 위하여 말한 유명한 동굴의 비유에서 비롯된 것이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는 그의 대화편 중 '국가'편의 제7장에 소크라테스와 그라우콘이라는 젊은 학도 사이에서 벌어지는 대화의 형식으로 나오고 있다. 그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몇 사람의 죄수들이 있는데, 그들은 어린시절부터 그 곳에서 발과 목에 사슬에 묶여서 머리를 뒤로 돌릴 수조차 없는 조건이었기 때문에 그 죄수들은 단지 그들의 전방에 존재하는 벽만을 바라볼 수 밖에 없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죄수가 사슬이 풀리어 우선 동굴 안에서, 죄수들이 참이라고 바라보았던 벽면의 그림자가 거짓임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이 사람은 동굴 밖으로 나아가 드디어는 햇빛의 실물 세계를 바라보게 되고 종국적으로는 해 그 자체를 바라보고 모든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는 예언자적 사명을 가지고 다시 그 암흑의 동굴속으로 들어와 동료였던 죄수들에게 그들이 바라보고 있는 세계가 모두 그림자의 그림자도 안 되는 형편없는 허위라는 것을 역설하지만, 죄수들은 그의 말을 믿을 수 없고, 나중에는 그들의 사슬을 풀고 그들을 동굴 밖으로 데리고 나가려는 그를 쳐 죽여버리는 결말로 끝나버린다. 이 유명한 동굴의 비유는 플라톤이 동굴속의 암흑의 세계를 인간의 감각적 인식의 세계 즉 그림자와 같은 환영의 세계라고 보고 동굴 밖의 광명(빛)의 세계를 예지계, 실재계, 즉 이데아 세계라고 보아 인간의 감각인식의 어리석음을 깨닫게 하려고 든 비유이다.」(출처:김용옥, 1987, 『중고생을 위한 철학강의』, 통나무, 230-231)

동굴 벽에 비친 그림자는 하나의 가짜상, 즉 본질적인 모습을 따라한 것에 불과하고 햇빛 아래에서의 모습이 실제 세계 즉, 이데아라는 것이다. 그러나 햇빛속의 모습 또한 진정한 이데아의 가짜상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이런식으로 플라톤은 이데아와 감각적 인식의 세계를 구별하고 이데아가 여러개의 층으로 나뉘어 있음을 말한다. 그리고 그 이데아의 층은 피라미드처럼 나뉘어서 아래의 이데아는 가장 본질적이고 포괄적인 최상의 이데아를 향해 나아간다고 봤다.

플라톤의 동굴의 우상에서 보듯이 '인식'이란 것은 지극히 상대적이란 사실을 알수 있다. 동굴에 갖혀서 지내던 때는 동굴 벽에 비친 그림자가 당연히 본질이었지만, 그 동굴의 테두리 바깥에서 바라보게 된 사람은 그동안 자신이 바라봐왔던 세상은 사실은 본질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듯이, 우리가 현실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현상계도 사실은 더 큰 테두리에 둘러싸인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영화 매트릭스에 플라톤의 동굴의 우상의 비유를 적용하면, 우리의 감각 기관을 통해서 알고 있는 현실이라는 현상계는 사실 컴퓨터가 만들어둔 매트릭스라는 프로그램이며 가상현실 즉 꿈속 세상인 것이다.

만약 모피어스의 말이 사실이고, 우리가 감각의 인식을 통해서 알고 있는 이 세계가 영화 매트릭스 속에 그려져 있듯이 일종의 가상현실 프로그램에 의해 구축된 꿈속이라면, 혹은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에서와 같이 무언가 알수 없는 테두리 속에 갖힌 그림자에 불과하다면 당신은 빨간약을 먹고 진실이나 이데아의 세상을 알기를 바라는가? 아니면 파란약을 선택해서 모든 것을 잊고 다시 꿈속의 일상이나 동굴속으로 돌아가기를 바라는가?

'인식'이란 것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이라면 우리는 의지의 힘으로 얼마든지 또다른 세상(그게 이데아든 또다른 무엇이라고 호명하든)을 바라볼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의지의 힘으로 현실의 테두리 바깥의 또다른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혹은 그런 방법이 발견이 되긴 한 것일까? 만일 방법이 있다면 빨간약을 집어 삼킬 용기가 있는가? 난 한 번 끝까지 가 보기로 한다. 가는 거야~  


| 이 세상은 진짜로 매트릭스인가? |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에서 우연히 이데아의 세계를 보게 된 죄수의 결말은 죽임을 당한 비극으로 끝났다. 현실세계에서도 죽임을 당할까?

禪수행을 통해, 혹은 인도의 요가 수행을 통해, 또는 알수 없는 힘에 의해 우리가 현실이라고 믿어의심치 않는 현상계가 사실은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된 사람은 죽음(육의 죽음이 아닌 의식 혹은 인식의 죽음)을 당하는 것일까? 다행히도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깨달음을 얻고 그 깨달음 때문에 죽임을 당하거나 자살했다는 사람에 대한 소식은 아직 접해본 적이 없다.

매트릭스에서 빨간약을 먹고, 현실(이라고 얘기하는)에 돌아왔던 사이퍼는 동료를 팔아서 다시 매트릭스 속으로 돌아가길 원한다. 만일 당신이 어느날 깨달음을 얻고서 이 현실이 사실은 이데아의 그림자라는 것을 알았거나, 혹은 신이 꾸는 꿈속 이야기거나, 아무튼 '나'라고 믿어왔던 자아가 허상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면 당신은 계속 이 매트릭스 속에서 꾸역꾸역 삶이 계속 되길 희망하는가?


| 양자역학적 관점에서 보는 실재론 |
이 글을 쓰다가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며칠 전 '우부메의 여름'이라는 일본 영화를 보다가 영화의 한 씬에서 양자역학에서 보는 실재론에 대한 얘기가 나와서 이 글이 문득 떠올라서 일단 붙혀둔다. 영화에 나오는 양자역학에 대한 얘기가 그다지 새로울 것도 없는 얘기긴 하지만, 앞으로 이 글을 연결해나갈 제재가 될 듯하여 맛보기로 붙혀두기로 했다.


양자역학적 관점에서의 실재론에 대한 깊은 얘기는 차후에 이어가기로 한다.
(첨부일 : 2008/11/12/23:58:10)

아직 정리가 덜 돼서 여기 까지만 새겨둠.
계속…….


정리가 끝나는 시점에 덧글 금지를 풀겠습니다. 정리중인 글에 덧글 달리면 안될 것 같아서 덧글 금지해뒀습니다.



여기에 소개된 책 한권 정도는 읽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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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외 관련서적]

- 우리는 매트릭스 안에 살고 있나 - 매트릭스의 철학 매트릭스의 과학 ∥ 글렌 예페스 (엮은이), 민병직, 이수영 (옮긴이) | 굿모닝미디어
- 매트릭스로 철학하기 ∥ 슬라보예 지젝, 윌리엄 어윈 (지은이), 이운경 (옮긴이) | 한문화
- 매트릭스, 사이버스페이스 그리고 선 ∥ 오윤희 (지은이) | 호미
- 음악과 매트릭스 ∥ 윤성원 (지은이) | 세종출판사(이길안)
- 철학으로 매트릭스 읽기 ∥ 김범인, 김시천, 박영욱, 심혜련, 이영의, 이정우, 조광제 (지은이) | 이룸

2007년 12월 21일 금요일

칼레파 타 칼라

지금 대선결과를 두고 우려하시는 분들의 글이 많이 눈에 띈다. 한편에선 우려하시는 분들을 되려 공격하는 사람들도 눈에 띈다. 보태준 것 하나도 없지만서도 되려 공격해대는 사람들 입에 들어가는 밥알이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대체 왜 그러고들 살아요? -.-;

대선결과를 두고 우려하시는 분들은
다수가 틀린 방향으로 가고 있기에 소수가 머리를 들고 소리를 높여서 바른 방향을 제시해주고 있는 것이다.

1천만이 넘는 그 다수를 막대놓고 욕하자는 것이 아닐 것이다. 사람의 마음이란 건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곤란한 것이다.
왜 소수가 다수에게 안 좋은 마음을 표출하는가? 그 마음의 뿌리를 봐야 하는 것 아닐까?

진짜 욕 먹을 사람은 따로 있다.
'대통령이 누가 되거나 말거나 나는 모르겠으니, 니네들 알아서 하란' 식으로 아예 관심조차도 없는 투표불참자들이 진짜 욕 먹을 사람이 아닐까 싶다. 국민의 뚜껍을 뒤집어 쓴 허수아비들이 이번엔 좀 더 늘었다. 아니 갈 수록 늘어나고 있다. 특별한 이유도 없이 투표에 불참한 사람들은 국민이기를 스스로 포기한 자들이다. 자유민주주의 이념에 입각해서 투표를 포기할 자유도 있다고 하지 말라! 사는 건 왜 포기하지 않는지 묻고 싶어지니깐……. 투표 불참한 그들이 사회를 위해 무슨 일을 하며 어느 위치에 있느냐와는 무관하게 그들은 자폭국민이다.

나는 민주주의를 대단하고 혁명적인 이념으로 여기지 않는다. 다른 분들은 어찌 생각하시는지 몰라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단지 민주주의의 단점을 보완할 대안적인 이념이 아직은 발견되지 않았고, 민주주의 사회체제 속에서 살아왔기에 울며 겨자먹기로 따라가고 있을 뿐이다. 짐작하기에 나 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전혀 없지는 않으리라 여겨진다.

이번 대선 같은 경우가 민주주의의 허점을 드러낸 어울리는 본보기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이렇게 표현한다고 해서 독재를 추앙하거나, 공산주의자라는 건 절대로 아니다. (※ 공산주의 사상은 머리 속에서나 가능한 한마디로 망상에 불과하니까요.)

그래서 나는 민주주의니까 다수의 의견에 머리 숙이고 따라가는 것이 옳은 것이라는 생각에는 찬성하지 못하겠다.
다수가 갈 길을 못 찾고 우왕좌왕 헤매이고 있을 때는, 바른 길을 제시해주는 것이 사람의 도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수의 힘이 정의로운 것이 아니라, 소수일지라도 정의로운 것이 힘을 발휘하는 사회가 도래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힘이 정의가 아니라, 정의가 힘이다' 이 생각도 어쩌면 공산주의 사상처럼 현실성 제로인 생각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스친다…….

왜 좋은 일은 이루어지기가 힘든 걸까? 참으로 기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인간 정신에도 어쩌면 도저히 뛰어 넘을 수 없는 '사상의 지평선' 같은 것이 있는 것은 아닐까 싶다. 그 도저히 넘을 수 없는 한계선 너머의 문제를 풀어보고픈 마음에 신 神이라는 이름의 절대자를 만들어두고 답을 찾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도 싶다.

이문열씨의 단편 중에 '칼레파 타 칼라'라는 제목의 소설이 있다.
'칼레파 타 칼라 Kalepa ta cala'는 그리스 철학자 소피클레스가 한 말로 '좋은 일은 실현되기 어렵다'는 뜻이다.

2007년 12월 19일 수요일

대선 유감 -.-+

어제(18일) 아버님 제삿날이어서 성당에서 평일 미사를 드렸습니다.
제 조카가 며칠 후면 부제품을 받을 예정이라 누님에게 끌려서 성당에 갔습니다. 끌려갔다는 건 농담이고요 ^^;

요즘 제가 신앙관에 좀 변화가 생겨서 미사드리는 걸 많이 소홀히 하고 있습니다. 조카가 부제품을 받고 내년엔 사제품을 받아서 천주교 신부님이 될 것이니, 제 신앙관과는 관계없이 형식적으로라도 미사 참여는 꼭 해야하는데, 자꾸 제 내면의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성당에만 계신 것이 아니라, 묵상기도를 드리는 바로 그 장소(그곳이 어디건)에 계신다는 암시를 주시더군요. ^^ 뭐 별스럽게 저 혼자서만 이런 느낌이 드는 것도 아닐 것이고, 저와 비슷한 신앙관을 갖고 사는 종교인들이 의외로 세상엔 많을 것이라는 것도 느낌으로 알고 있고요. 요즘은 미사를 드리고 신부님의 설교를 듣는 시간에도 도대체 내가 지금 왜 이곳에 앉아 있는가? 하는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자꾸 들어서 신부님 설교도 귀에 잘 들어오질 않습니다. 분명히 그 시간은 축복된 시간임을 알고 있음에도 말이죠….

아무튼 누님과 함께 미사를 드리고 집으로 오는 길에 대선에 대한 이런 저런 얘기를 하게 됐습니다.
대화 도중에 "내가 생각하는 대통령상은 '깨끗하고 맑은 사람'이어야 한다. 어차피 대통령이 할일을 내더라도 실제 일은 밑에 사람들이 다 하는 것인데, 할일을 정하는 대통령이 맑지 못한 마음으로 낸 안건을 밑에 사람이라고 제대로 할 것 같지도 않을 것 같다. 그래서 그 인물의 됨됨이를 최우선으로 여긴다." 대충 이런 얘기를 하며, 이번 대선이 아니라 다음 대선을 내다보고 '문국현 후보'를 찍겠다고 했습니다. 물론 누님도 비슷한 생각이시더군요.

누님이나 저나 어차피 '이명박 후보'가 대통령이 될 것이라는 건 알고 있었습니다. 국민들 거의 대부분이 속으로는 알고 있는 것이기도 한 일이지요. 비록 표면적으로 나타내지는 않더라도 속으로는 전부 그렇게 알고 있죠. 그리고 대통령은 역시 예상대로 그렇게 됐습니다.

제가 안타까운 건 투표율이 해가 갈수록 저조하다는 것도 아니고, 국민들의 정치인 불신의식 문제도 아닙니다. 서민경제를 파탄낸 열린우리당을 욕하자는 것도 아닙니다. 잘못된 것을 뻔히 알면서도 왜 그 잘못된 불씨를 꺼지 못하고 오히려 불을 붙혀서 잘못된 불이 되살아나도록 하는 이 나라 국민들의 정서가 안타까울 뿐입니다.

우리나라 서민들 지금 먹고 살기 힘든 것 잘 알고 있습니다. 저 자신이 서민의 아들로 태어났고, 지금 그 서민으로 하루하루를 살고 있으니까요. 서민으로 살고 있는 게 자랑도 그렇다고 해서 한탄도 아닙니다. 서민으로 어렵게 사는 것이 돈 버는 방법을 몰라서도 아니고, 돈이 흐르는 루트를 몰라서도 아닙니다. 돈이란 것 벌려고 맘만 먹으면 남부럽지 않게 벌수 있습니다. 하지만 돈을 쫓다가는 인생에서 잃는 것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젊은 날에 너무나 일찍 깨달아버린 탓에 스스로 가난의 구렁텅이에 빠져서 살고 있지만, 가난해도 행복한 마음으로 살아왔고, 살고 있고, 앞으로도 이 마음은 결코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삶을 바라보는 관점은 사람마다 제각각입니다. 사회가 어려울수록 물질만능, 황금만능주의가 득세할 수 밖엔 없겠지만, 이번 대선 개표방송을 바라보면서 정말 눈물이 나더군요. '힘들 수록 돌아가라'는 선현들의 말씀이 가슴을 치더군요. 아무리 '목구멍이 포도청'이라지만, 아닌 건 아닌 것 아닐까 싶습니다. '경제대통령'이란 구호 한마디에 혹해서, 한 때 거대그룹을 이끌었던 인물이라고 해서 한나라의 대통령으로 몰아가는 이 나라 국민의 민심이 참으로 안타까울 뿐입니다.
또다른 측면에서 바라보면 이번 대선의 결과는 우리나라 국민의 '빨리빨리' 병이 초래한 결과물이 아닐까 싶습니다. 힘드니깐 빨리빨리 잘 살고 싶다. 이 지긋지긋한 어려움에서 벗어나고 싶다. 물론 수긍은 갑니다. 하지만, 회사를 이끄는 것과 나라를 이끄는 것은 근원적으로 다른 일입니다. 지난 대선 때 어떤 마음으로 현 대통령을 뽑았습니까? 대체 이 나라 국민의 근시안적인 사고방식은 언제 쯤 고쳐질지…….

소설가 이외수씨의 플레이 톡에 올라온 글이 눈에 띄어 갔다 붙혀둡니다.
5년 후에 이 나라가 '경제대통령'을 외치던 그 분의 공약대로 되길 기원합니다.
잘 살고 싶다는 게 잘못된 건 아니겠죠.
하지만 인생이 잘 먹고 잘 살기만 하면 그걸로 다 된 걸까요?
물론 답은 각자의 몫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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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수의 플레이 톡 주소 : http://playtalk.net/oisoo/

2007년 12월 14일 금요일

한국무신론자협회가 탄생했답니다。


한국무신론자협회가 탄생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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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무신론정보, 해외 무신론정보, 종교특혜반대, 유일신종교반대, 칼럼 등의 다양한 정보를 갖추고 있으며、국제무신론자연맹(AAI)와도 연대중이고、세계 무신론 석학들이 모여서 세미나、토론회를 국내에서 가질 예정이랍니다。


[들어가며]

살아오며 별 희한한、이상한、괴상한、요상스런 단체들 많이 봐왔지만 '무신론자협회'라니!
그들의 논리대로라면 없는 걸 없다고 주장하려는 단체이니 …… 이건 대체 뭔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린지?

1. 무신론자들의 의식의 흐름대로라면 신이 없다는 말일텐데、없는 건 그냥 없는대로 놔두면 되는 것 아닌가? 굳이 없는 걸 없다고 주장할 필요가 있나? 없는 건 그냥 없는 것 아닌가? 그걸 뭘 주장씩이나 하려는 걸까?

2. 무신론을 내세워서 무슨 이득을 챙기시려는 걸까???


[없는 것이 없다? 이게 말이 되긴 한다고 생각하는가?]
예전에 도올 선생의 어느 강좌에서 들은 적이 있는데、무신론도 결국은 신을 인정하는 것 밖엔 안된다고 하더군요。

신의 존재성에 대해서 무신론자들의 생각대로 하자면 없는 것을 없다고 주장한다는데、없는 것이 또 없을 수는 없으니、이건 논리를 따지기 이전에 아예 말이 안되는 것이고、

결국 종교인들은 신이 있다고 주장하는데、그 논리가 오류라는 것을 증명해야지 무신론이 증명되는 것인데、신의 존재성은 어차피 비물질적인 정신의 문제인데、그걸 어떻게 논리로 없다고 풀어낼 것인가? 종교인들이야 논리가 아니라 믿음이니 관계없지만…… 무신교인들 뒷골 많이 땡기겠다。-.-;

그런데 신은 니체가 죽이지 않았었나? 다시 부활했나 ^^;

자신이 믿는 신이 최고라고 주장하는 맹신도 및 광신도도 문제가 많지만、무신론도 그에 못지 않게 문제가 많다고 보입니다。어차피 증명도 안되는 대상을 갖고서 치고 받고 싸움질들인지…… 많이 배웠다고、많이 안다고 해서  좋은 것만은 아닌 것 같네。신학、종교학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라도 그저 아들、딸、손자들 위해서 두 손 모아 기도하는 절간의 할매보살들、교회당의 할매자매들보다 니네들이 나은 게 대체 뭐가 있냐……? 배워서 한다는 짓이 허구헌 날 논리나 따지고、입싸움、글싸움이나 하고……

종교사를 돌이켜보건데、종교로 인해서 폐해가 많았던 것도 사실이고、지금도 알게 모르게 사회 전분야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지만、그런 와중에도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음지에서 묵묵히 좋은 일 하시는 분들은 대체 뭐란 말인가?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는 음양이 함께 공존하는 것이거늘……


[목적이 뭐냐? 표면적인 취지 말고、진짜 목적은 뭔데?]
무신론자협회를 대충 훑어보니 유일신교(결국은 기독교를 지칭하는 것이더군요)의 '심판、지옥、멸망' 이런 도그마(교리)를 포기하면 수용하겠답니다。여기서 뻥찌겠더군요。대체 언제부터 '심판、지옥、멸망'이 기독교의 도그마가 됐답니까? 천주교를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25년 동안 믿어온 저는 금시초문이네요。기독교에서 도대체 언제 '심판、지옥、멸망'을 주장했습니까? 아마 구약의 교리를 말하는가 본데、구약은 엄밀히 말하면 기독교의 교리가 아닙니다。아직도 구약을 기독교의 교리와 연결해서 생각하는 무지몽매한 모리배들이 존재한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입니다。대체 언제까지 자기 맘대로 식의 해석으로 기독교를 비아냥대고 비하할 건지……。

무신론자협회에서 구약의 교리를 아직도 기독교의 교리로 착각하고 있는 것도 어쩌면 몰지각하고 몰상식한 일부 종교 장사꾼 목사들의 어처구니 없는 종교를 빙자한 개인사업화의 영향도 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하지만 신약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사랑'이었고、'구원'이었습니다. 여기에서 기독교의 모든 교리가 파생되어 나오는 것입니다。'심판、지옥、멸망'은 '사랑'과 '구원'을 강조하기 위해서 대조 관념으로 나타내어 이용하는 개념일 뿐입니다。'심판、지옥、멸망'은 예수님께서 주장하신 게 아닙니다요。이 어처구니 없는 사람들아! 기독교 교리 체계의 기초도 안된 사람들이 무슨 도그마를 포기하라마라、수용을 하느니 마느니 어처구니가 없을 뿐입니다。

어떤 대상을 비판을 하려면 그 대상이 말하는 바의 진의가 무엇인가를 명확히 알고、그 논조의 잘못을 비판해야 하는 건데、무신론자협회 얘네들은 한마디로 똥인지 된장인지 구분을 못하고 있더군요. 한심스러워서 더 이상 말도 하기 싫더군요. 언젠가는 그들도 신약을 통독할 날이 오겠죠。신약 전체를 통독할 자신이 없거든 제발 '요한 복음'이라도 통독해보길 권하는 바이다……。

교리고 뭣이고 다 집어치우고、진짜 궁금한 건
무신론자협회에서 무신론을 주장한다는 취지 아래、무슨 이득을 챙기려는 건지 그 내막이 궁금할 뿐이다。ㅡ.-+
무신론자들아! 겨울이다。감기 안 걸리게 옷이라도 따습게 입고 댕기라。
니네들은 신을 믿지 않으니 혹여 독감이라도 걸려서 사경을 헤매는 경우가 발생하면 살려달라고 어디 빌 곳도 마땅치 않을테니、니네들 몸은 니네들이 알아서 잘 챙겨라! 불쌍타! 소도 비빌 언덕이 있어야 가려운 데를 비비는 법인데…… 너무 안됐다。

바쁜 세월에 영양가 없고、쓰잘데기 없는 단체 하나를 어쩌다 접하게 돼서 꼴통 속에 주입시켜버렸다。심심할 때 한 번씩 가서 씹어줘야지! 근데 심심할 새가 없는데 이를 어쩌나…… 그냥 니네들끼리 모여서 사이좋게 놀아라! -.-+


[무신론자들에게 전하는 말]
요즘 '리처드 도킨스'라는 무신론자가 쓴 『만들어진 신 The God Delusion』을 읽고 있는데、갈수록 어안이 벙벙해지고 있습니다。

어떻게 똑같은 사람인데、그토록 신의 존재성에 대해서 다른 견해를 가질 수 있는 건지…… 도대체 어디서 부터 갈림길이 갈라진 것인지…… 어쩌면 리처드 도킨스는 애초에 신의 존재성에 대한 시초부터가 다르게 시작됐는지도 모르겠네요。아무튼 여건만 마련되면 리처드 도킨스가 왜 무신론자가 된 것인지、그 근원을 캐고 들어가 보고 싶습니다。하지만 여건이 마련된다해도 그다지 할 것 같지는 않아요。사람들이 왜 무신론자가 되는지 매커니즘의 전체는 아니더라도 일부는 이미 체득하여 알고 있으니까요。

사실 제가 예전에 한 때、극렬하게 '신은 없다'고 나발 불고 다녔습니다。-.-; 그래서 그 논리의 어처구니 없음을 누구보다 잘 알죠。

무신론자와 유신론자는 사실 알고 보면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어차피 무신론이건 유신론이건 결국은 한 몸에 있는 다른 방향일 뿐이죠。그걸 깨닫는 순간 다시 성당에 나가게 됐죠。굳이 천주교가 아니더라도 다른 종교를 믿을 수도 있었지만、모태신앙이라 가장 가까이 있어서 다시 믿고 있죠。어차피 형태만 다를 뿐 신은 딱 하나 뿐입니다。제가 말하는 '신은 하나'라는 개념은 기독교、멀게는 유대교의 유일신 개념이 아니라、우주삼라만상의 시초는 딱 하나에서 시작됐다는 제 나름의 가치관에 의한 것입니다。

신이 여러개일 것(다신론을 말하는 것이 아님、신의 개념에 대한 출발점에서의 신에 대한 생각)이라고 믿는 순간 무신론자가 되고、신이 하나일 것(유일신 개념 아닙니다。)이라고 믿는 순간 유신론자가 됩니다。제가 머리가 영특하지 못해서 이 간단한 것을 깨닫는데 수십 년이 걸렸습니다。(헷갈리시겠지만, 그냥 그렇게 생각하나부다 하고 넘어가 주세요. 제 나름의 종교관에 의한 체계일뿐, 세속에 퍼져있는 생각과는 다른 것이니 선듯 잘 안 받아들여질 것입니다. 기독교를 인격신의 한 범주라고 단정짓는 학설이 있지만, 난 기독교는 결코 인격신이라 믿지 않습니다. 무슨 넘의 절대자라는 분이 인간처럼 화내고, 짜증을 낸답니까? 그게 신으로서 할 도리일까요? 기독교 종교사를 들여다보면 기독교와 유대교의 짬뽕이 있었고, 그 중 대표적인 것이 구약을 정경에 포함한 것입니다. 기독교 교리에 대한 몰이해와 불이해는 전부 구약의 이야기들 때문에 시작됐다고 믿습니다. 구약을 없다고 생각하고, 신약의 예수님 말씀만 떼어서 기독교를 들여다보면 도대체가 몰이해가 나올 이유가 없습니다.)

다신론을 포함한 신이 여러개일 것이라는 생각은 그 시초부터 논리의 오류에 지나지 않습니다。신이라는 존재를 인격신으로 믿어버리는 사고관에선 아무런 이상이 없는 논리일진 몰라도 인격신의 개념이 아닌、절대자의 관념에서 정의내리는 신은 딱 하나(재차 하는 얘기지만, 세속에서 얘기하는 '유일신' 개념 아닙니다.)여야만 합니다。

+ 다신론도 따지고 들어가면 결국은 하나로 귀결됩니다。다신론 신의 다른 모습들은 하나의 또다른 면들일 뿐이죠。

+ 진정으로 믿는다면 야훼든、하느님이든、알라든…… 어떤 이름으로 호명하는 신이든 하나의 모습으로 현현할 것이다。그게 신의 모습이다。

무신론자들은 헤라클레이토스(변화, Becomming)의 세계관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종교인들은 파르메니데스(존재, Being)의 세계관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완전히 반대의 개념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둘의 합일점은 결코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종교론에 있어서 신의 존재성을 따지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살아오며 누누히 얘기해 온 것이지만 신은 '있다。없다。'는 따짐의 대상이 아니라、믿느냐! 마느냐!는 선택의 문제일 뿐이다。

'믿고 싶으면 믿고、 믿기 싫으면 안 믿으면 되는 것이다。'

- 무신론자들아 타인의 믿음에 대해서 '있다。없다。' 라고 단정내리지 말라!
눈에 보이는 게 전부인 것 같지만、가시적인 세상은 창조된 세상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 무신론자들은 종교가 역사적으로 폐해를 입히고 있다고 말하길 좋아한다。
종교만이 폐해를 입혀왔느냐?고 반문하고 싶다。

- 무신론자들은 왜 종교의 폐해만을 바라보고、종교의 잇점은 바라보지 못할까?
난 그게 궁금할 뿐이다。

2007년 12월 11일 화요일

우주의 구멍:The Hole in the Universe (2001)


우주의 구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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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제목:The Hole in the Universe (2001)
· 지은이:K. C. 콜(K. C. Cole)
· 옮긴이:김희봉
· 출판사:해냄출판사
· 책가격:15,000원
· 출간일:2002.09.05
· 책장정:A5신(223*152mm) / 양장
· 페이지:348쪽
· ISBN(13자리):8973374877


<우주의 구멍>은 철학과 과학을 넘나드는 논제인, 0(無, zero)의 신비를 규명해 온 과학자들의 목소리가 담긴 책이다. ‘없음’의 수학적 표현인 0의 역사를 더듬어감으로써 무, 0, 상대성이론, 양자역학, 초끈이론 등 인간이 우주의 근원을 설명하기 위해 제기한 끝없는 이론의 행렬을 한자리에 모아 매력적인 0의 세계를 열어 보인다.


| 도서 소개 |
‘없음’은 인간의 뇌에서 나온 가장 풍부한 개념이다!
우주를 가득 메운 ‘없음’은 실재하는 것인가?
과학과 철학 사이에서 갈등하는, ‘0의 신비’를 찾아 떠나는 과학자들의 끝없는 탐구!
존재와 부재를 넘나들며 우주의 근원을 찾아가본다!

출간 의의
철학과 과학을 넘나드는 매혹적인 논제, 0(無, zero)
0의 신비를 규명해 온 과학자들의 목소리가 여기에 있다!

보이지도 않고 느끼기도 어려운 ‘없음’이라는 개념이 과연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0을 둘러싼 과학자들의 치열한 연구는 과연 무엇 때문일까? 동그란 도넛 한가운데 있는 구멍이 ‘없음’인지, 아니면 도넛이라는 것을 알리는 ‘있음’인지에서부터, 검은구멍을 과연 텅 빈 구멍의 개념으로 받아들여도 되는지에 이르기까지 0의 신비는 무한하다.

『우주의 구멍』은 ‘없음’의 수학적 표현인 0의 역사를 더듬어감으로써 무, 0, 상대성이론, 양자역학, 초끈이론 등 인간이 우주의 근원을 설명하기 위해 제기한 이론의 끝없는 행렬을 한자리에 모아 매력적인 0의 세계를 열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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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와 부재를 넘나드는 ‘없음’의 매력

다방면에서 학문적 성과를 넘나들며 0의 만찬을 선보이는 K. C. 콜. 그녀는 왜 0의 매력에 빠져든 걸까? 왜 우리는 한계도 없이 흐물거리고, 물질적이라고 하지만 확실한 모습을 알 수 없는 무에 대해 알아야만 하는 걸까? 도대체 왜 존재이자 부재인 무를 탐구해야 한다는 걸까?

니체는 말했다. “우리는 계산한다. 그러나 우리는 계산하기 위해 먼저 허구를 꾸며내야 한다.” 그렇다. 사과 하나와 또다른 하나를 더하기 위해서는 사과라는 ‘실체’ 두 개가 있어야 하지만, 1이라는 숫자에 또다른 1을 더하기 위해서는 1이라 불리는 ‘숫자’를 머릿속에 담아놓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수학은 기본적으로 허구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여기 1과 또다른 1이라는 나름의 ‘실체’가 없는 개념이 또 있다. 존재와 부재를 넘나드는 ‘없음’이라는 개념이 바로 그것이다. ‘없음’은 진정 없는 것일까? 없음을 논하려면 우선 ‘있음’을 가정해야 한다. 그렇다면 없음 역시 진정한 없음은 아니다. 왜냐하면 없음이라는 개념을 머릿속에 담아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없음’의 수학적 이름 0, 철학적 이름 무(無)
이 책은 0이라는 개념이 없던 고대에는 사람들이 ‘비어 있음’ 또는 ‘없음’을 어떻게 인식했고 표기했는지 등의 아주 쉬운 문제들부터 시작한다.

다음 페이지의 ‘각 장 내용’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처음부터 5장까지는 무의 탄생과 역사적 발전, 무와 물리학의 관계를 이야기한다. 우주의 근원을 설명하기 위해 과학자들이 0과 무를 탐구했던 이유를 이 부분에서 알 수 있다.

6장부터는 우주를 설명하는 최신 이론으로 평가받고 있는 초끈이론과 무에 대해서 설명한다. 저자는 고대의 황량한 빔(emptiness) 개념부터 현대 물리학에 의해 제기된 공(空, void) 개념을 순차적으로 설명한 다음, 초끈이론과 무의 관계 순으로 독자들의 이해도를 높여간다.

만물의 근원, 우주의 시작이 ‘없음’이라는 개념에 녹아 있다!
물리학자들의 수많은 저서에서 발췌한 0에 대한 문구를 시작으로 한 편의 컬럼처럼 구성된 이 책을 읽다보면, 무(혹은 없음)라는 개념의 탄생과 역사적 발전에서부터 초끈이론 같은 최신 물리학 이론까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그러고 나면 왜 과학자들이 만물의 근원을 설명하는 데 0을 파고드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전문적인 과학적 지식과 컬럼리스트의 글맛이 어우러진 『우주의 구멍』은 과학을 어려워하는 독자들이 물리학과 수학, 그리고 우주론에까지 흥미를 느끼고 다가갈 수 있도록 길을 안내한다.

각 장(章) 내용
+ 초끈이론을 쉽게 풀기 위해 도입된 0의 의미
+ 0의 역사를 더듬어봄으로써 배울 수 있는 만물의 근원!

1장 왜 무인가에서는 이 책에서 다룰 무의 종류에 대해 예비적인 설명을 하고,

2장 무의 등장에서는 0과 무의 내력을 살펴본다. 루크레티우스, 데모크리토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 라이프니츠와 같은 사상가들이 무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짧게 살펴보고, 뉴턴과 아인슈타인이 공간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 또 공간을 채우는 에테르 개념에 대해서도 알아본다.

3장 혼란스러운 무에서는 0의 도입이 수학에서 가지는 의미를 살펴보고, 0과 무한, 미분적분학의 등장에 대해 알아보며, 수학에서 0이 바탕이 되고 기준점이 되어 모든 것을 설명한다는 발상을 설명하고, 항상 0, 즉 균형을 이루어야 하는 양이 물리학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언급한다.

4장 무대 중심에 선 무에서는 마당(장, field), 양자역학적인 현상들 즉 미시적인 규모에서의 불확정성 원리가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에너지보존법칙을 어기고 없던 입자들이 끊임없이 생성되고 소멸되는 양자요동, 쿼크는 언제나 몇 개 단위로 뭉쳐 다녀서 홀로 돌아다니는 쿼크는 결코 관찰할 수 없는 것이 결국 진공의 성질 때문이라는 것 등을 말한다.

5장 무대 중심이 된 무에서는 공간이 휘었다는 것으로 중력을 설명하는 일반상대성이론을 소개하고, 일반상대성이론의 결과로 나오는 검은구멍에 대해서 말한다. 또 우주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매우 거대한 규모에 적용되는 일반상대론과 미시적인 규모에 적용되는 양자론을 조화시켜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현재의 난점을 설명한다.

6장 무의 줄타기에서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대안으로써 초끈이론을 소개하고,

7장 모든 것이 무에서 나온다와, 8장 무소식이 희소식에서는 이제까지 나온 공간, 마당(장, field), 진공, 양자론, 상대론, 초끈이론 등으로 우주를 해명하는 일에 대해 계속 설명한다.

9장 마음속의 무에서는 초점을 약간 바꿔서 우리의 감각에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것이라는 뜻의 무에 대해 알아본다. 다시 말해서 심리적인 무 또는 감각적인 무에 대해 설명하고, 불교의 무에 대해서도 짧게 말한다.

10장 무를 찾아서에서는 이제까지 나온 이야기들을 정리하면서 무의 개념이 앞으로 어떻게 변해갈 것인지 설명한다.


| 책 표지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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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음'은 인간의 뇌에서 나온 가장 풍부한 개념이다!
우주를 가득 메운 '없음'은 실재하는가?
과학과 철학 사이에서 갈등하는, '0의 신비'를 찾아 떠나는 과학자들의 끝없는 탐구!
K. C. 콜은 우아하고 유머러스하며 풍부한 재주를 지니고 있는 과학 컬럼니스트이다. 그녀는 우주론에서 입자물리학을 지나 끈이론까지 흐르는, 장대하고 생생한 현대 물리학 여행으로 독자들을 이끈다. 우리는 모든 길이 결국 '무(無)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우주의 구멍」은 우리 시대의 가장 근본적인 과학 문제들에 대한 흥미롭고 즐거운 탐험이다. - 브라이언 그린(「엘러건트 유니버스」저자)

뛰어난 책이다. K. C. 콜은 원자 속과 우주 밖의 신기한 세상에 파견된 우리의 외교관이다. 그녀는 이사한 물질들로 구성된 11차원 속에서 연관성을 발견하였으며, 거기에서 유머까지 찾아냈다. - 데이바 소벨(「경도」,「갈릴레오의 딸」저자)

'무'라는 개념을 깊이 있으면서도 가볍고 쉽게 탐색한 K. C. 콜은 다양한 방면에서 조예가 깊다. 그녀는 우주론자나 물리학자, 신경학자, 심리학자, 예술가, 심지어는 신비가들이 무의 생산적이고 불가결한 가칠르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보여준다. - 올리버 섹스(의사이자「색맹의 섬」저자


| 책속에서 |
+ 책 속에 담긴 학자들의 명언
매혹적인 논제 0, 그 신비를 규명해 온 과학자들, 고대로부터 끊임없이 제기된, 만물의 근원을 찾으려는 노력을 보라!

  • 사물 속에 빔이 있다. ―루크레티우스
  • [빈 공간]은 물체들에 의해 이리저리 흔들리고, 흔들리는 공간은 다시 물체들을 흔든다. ―플라톤
  • 공간은 비어 있지만 아무것도 없지는 않다. 거기에는 무언가 있다. 그 외에 아무것도 없기는 하지만, 공간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뉴턴
  • 무에서 충분히 모든 것을 끌어낼 수 있다. ―라이프니츠
  • 무는 존재를 유혹한다. ―사르트르
  • 우리는 계산한다. 그러나 우리는 계산하기 위해 먼저 허구를 꾸며내야 한다. ―니체
  • 어떤 사람이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다는 것은, 실제로 그가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거나, 금고 속에 넣어둔 돈이 빚과 같다는 것이다. ―아인슈타인
  • 0은 거기에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기 위해 꼭 있어야 하는 것이다. ―메닝거
  • 무를 알면 모든 것을 알 수 있다. ―서스킨드
  • 어떻게 해서 한순간에는 무언가 있고 다음 순간에는 아무것도 없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콜브
  • 원자는 99.99퍼센트 이상이 빈 공간이지만, 나는 벽을 뚫고 지나가지 못한다. ―레더먼
  • 진공이란 더 이상 아무것도 제거할 수 없는 상태를 말한다. 진공은 빈상자이다. 그렇다고 빈 상자가 구조를 갖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콜먼
  • 우리는 시간과 공간에 너무나 익숙해서 그것들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시간과 공간은 과학이론과 철학사상의 복잡하고 아름다운 구조물을 불안하게 떠받치고 있는 토대의 일부이다. ―호프만
  • 어떤 것이 실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단순히 그것을 존중한다는 뜻이다. ―와인버그
  • 0은 탐욕스러워서, 곱하면 어떤 수든 0으로 바꾼다. ―베이어
  • 무는 사실이기에는 너무나 놀랍다. ―패러데이그릇은 진흙으로 만들지만, 쓰이는 것은 그릇 속에 담긴 빔이다. ―『도덕경』


+ 각 장(章)의 핵심 구절
  • 우주에는 구멍이 있다. 그것은 벽에 난 쥐구멍처럼 분명하게 어떤 곳에서 어떤 곳으로 통하는 구멍이 아니다. 어쩌면 그것은 형태도 없고 경계도 없는 마음속의 빈 자리다. 가슴으로 느껴지는 부재(不在)이고, 뭔가가 빠진 듯한 틈이며, 우주를 보는 우리의 시각에 크고 뚜렷하게 나타나는 맹점이다.
    ―‘1장 왜 무인가’ 중에서

  • ‘없음’은 실제로 있는 것을 뜻하기도 하고 없는 것을 뜻하기도 하는 이중성을 가진다. 그래서 극작가, 소설가 등 말장난을 즐기는 사람들은 이것을 끊임없이 이용한다.

    루이스 캐럴(L. Carroll)도 이런 말장난을 했다. 수학 해설의 대가 가드너(M. Gardner)의 지적에 따르면, 『앨리스의 모험(The Alice adventure)』에서 하얀 왕은, ‘노바디(Nobody)’는 토끼보다 빠른데 왜 3월의 토끼보다 늦게 오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호메로스도 『오디세이아』에서 똑같은 말장난을 했다. 외눈박이 거인 키클롭스가 선원들을 잡아먹을 때, 간 큰 율리시스는 키클롭스에게 자기의 이름이 ‘노바디’라고 말했다. 나중에 율리시스는 술에 취해 잠든 거인의 외눈을 불타는 꼬챙이로 찌르고 달아났다. 비명을 듣고 달려와 누가 그랬냐고 묻는 친구들에게 거인은 괴롭게도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노바디(아무도 안 그랬어)!” 율리시즈는 유유히 달아났다.
    ―‘1장 왜 무인가’ 중에서

  • 태초에 아무것도 없었다. 0도 없었고, 빈 공간도 없었다. 인간들은 우연히 0과 무에 걸려 넘어졌고, 공포에 떨었다.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며 0을 멀리했고, 나쁜 영향을 준다고 금지했으며, 심지어 신성모독으로 몰아붙이기도 했다. 이 미운 오리새끼는 수백 년이 지나서야 그 잠재력을 꽃피우게 되었다. 수학자 단치히(T. Dantzig)가 말했듯이, 0의 발견은 “발전의 전환점이었고, 그것 없이는 현대 과학과 산업은 물론 상업조차 불가능했을 것이다.”
    ―‘2장 무의 등장’ 중에서

  • 0은 야누스의 얼굴을 하고 있다. 한쪽은 무를 보고, 다른 한쪽은 모든 것을 본다. 무한대는 0보다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킨다. 0은 최소한 확실히 멈추는 점이라도 있다. 그러나 무한대에는 가장자리가 없다. 이것은 경계가 없이 새어 나간다. 깔끔하게 매듭진 0과 달리, 무한대는 구석에 몰아넣을 수가 없다. 무한대로 펼쳐진 빈 공간은 벽이나 이성으로 가둘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공(空, void)을 그렇게 싫어한 이유 중의 하나는, 물체가 전혀 저항이 없어서 무한대의 속도로 움직이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스 인들에게 무한대에 대한 반감은 진공에 대한 반감만큼 컸다.
    ―‘3장 혼란스러운 무’ 중에서

  • 힉스 마당(장, field)이 하는 가장 결정적인 일은 입자(따라서 모든 물질)에 질량을 주는 것이다. 질량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무거운 소파를 밀기 어렵게 하고 야구공보다 볼링 공을 던지기 어렵게 하는 그 무엇이다. 질량은 관성의 척도이고, 관성은 물질이 밀거나 끄는 것에 대한 자연스러운 저항이다. 관성이 없으면, 언제 어디서나 모든 것이 빛의 속도로 날아다닐 것이다.

    아, 하지만 대부분의 물질들은 빛의 속도로 날아다니지 못한다. 그 이유는 힉스 마당(장, field)이 걸리적거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윌첵은 이것을 ‘우주적 당밀’이라고 즐겨 부른다. 이 걸리적거림을 우리가 질량으로 느끼는 것이다. 이것은 입자들이 어디를 가든지 끌고 다녀야 하는 십자가와 같은 것이다.
    ―‘4장 무대 중심에 선 무’ 중에서

  • 당신이 이 책을 실외에서 읽고 있다면, 빛 입자는 태양에서 온다. 빛은 태양의 눈부신 표면에서 약 8분에 걸친 여행 끝에 우리에게 도달한다. 이 입자는 광속도로 종이를 때리고, 검고 흰 종이 위에 찰나적으로 머물다가 동공으로 들어간다. 빛알들은 망막에 비처럼 쏟아져서 무수한 다른 빛알들과 섞여버린다. 거기에는 코에 맞고 들어온 놈, 유리창에 반사되어 들어온 놈, 안구 속의 걸쭉하고 투명한 액체(때때로 여기에 빛이 차단되어 검은 실 같은 것이 눈에 보이기도 한다)를 뚫고 온 놈, 눈 속의 혈관에 맞고 온 놈과 나뭇잎, 하늘, 개, 손가락, 탁자, 물컵에 맞고 온 놈 등 별별 것이 다 있다.

    이 모든 빛알들이 눈의 뒷면에 모여 이미지를 만들지만, 이것은 뒤집히고 뒤틀리고 혼란스럽고 엄청나게 불완전한 정보의 뒤범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인쇄된 종이에서 글씨를 ‘본다’.
    ―‘5장 무대 중심이 된 무’ 중에서

  • 물리학자들에게 알려진 지 거의 30년이나 된 끈이론은, 모든 사람들이 깜짝 놀랄 만큼 끈질긴 생명력을 발휘했다. 이것은 쿼크들이 어떻게 중성자와 양성자 속에 함께 달라붙어 있는가 하는, 이른바 쿼크 속박 문제를 푸는 과정에서 우연히 발견되었다. 처음에는 그 방정식이 무엇을 묘사하는지조차 아무도 몰랐다. 이 이론은 불가능하다고 알려진 빛보다 빠른 입자를 예측했다. 이 이론에는 물질 입자가 없었고, 힘을 전달하는 입자만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26차원을 필요로 했다.
    ―‘6장 무의 줄타기’ 중에서

  • 사실 유에서 무를 만들기보다 무에서 유를 만드는 것이 더 쉽다. 버클리의 캘리포니아 대학 인지심리학자 트리스먼(A. Treisman)은 여러 개의 Q 속에 O 하나를 숨겨 놓으면 사람들이 그것을 찾아내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의 뇌가 O에 꼬리를 붙여 Q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수많은 O 속에 Q가 하나 있을 때는 쉽게 찾아낸다.

    다시 말해 있는 것은 찾기 쉽다. 그러나 없는 것은 찾기 어렵다. 두 상황이 거울에 비춘 것과 같이 완전히 대칭인데도 그러하다.
    ―‘9장 마음속의 무’ 중에서

  • 자연은 왜 ‘완벽한 대칭’이 아니라 ‘거의 완벽한 대칭’일까? 왜 그렇게 많은 물리 상수들이 완전히 0이 아니고 0에 근접하는 걸까? 초기 우주를 지배했던 입자와 반입자의 쌍소멸에서 왜 물질이 반물질보다 아주 조금 많았을까? 중성미자는 왜 그렇게 작은 걸까? 시간은 왜 한 방향으로만 흐르는 걸까?

    다시 말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불완전성의 이유는 무엇일까? 파인만은 『물리학 강의(Lectures on Physics)』에서 이 질문을 던지고, “아무도 왜 그런지 모른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완벽한 대칭은 너무 아름답다는 것을 답으로 제안했다. 그런 다음에 그는 일본의 니코우에 있는, 그 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문에 대해 말했다. 그 문은 정교하게 조각되어 모든 것이 완벽한 대칭을 이루지만, 단 하나의 작은 부분이 거꾸로 새겨져 있다고 한다. 그것은 일부러 거꾸로 새겨져 있는데, 이유는 신이 인간의 완전성을 질투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 생각을 뒤집어서, 자연이 대칭에 가까운 진짜 이유를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신이 자연을 거의 대칭으로 만든 것은, 인간이 신의 완전성을 질투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다행히도 무는 진실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아름답고, 다른 모든 것들은 그렇지 않다.
    ―‘10장 무를 찾아서’ 중에서


| 지은이 소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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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저술계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 K. C. 콜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의 과학 컬럼니스트. 세계적인 베스트 셀러「아름다운, 너무나 아름다운 수학(The Universe and the Teacup)」으로 1995년 미국물리학회 우수과학저술상을 수상했으며,「먼저 구름을 만들어보세요(First You Build a Cloud)」의 저자이기도 하다. 다방면을 아우르는 유능함과 재기발랄한 감각으로 미국 과학저술계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라 불린다. 현재 UCLA에서 강의하고 있다.

저자는 미국 과학저술계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같은 존재다. 뛰어난 지적 문학적 철학적 사고로 전문 과학서 독자층을 매료시킴과 동시에, 재기발랄한 언어 감각으로 일반 독자층까지 사로잡는다. 때문에 최근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을 이어주는 다리로 초끈이론을 소개한 브라이언 그린의 『엘러건트 유니버스』가 다소 어려웠던 독자들이라면, K. C. 콜의 글재주로 다듬어진 초끈이론을 통해 거대한 우주의 기원을 접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무에 관심 있는 인문서 독자들이라면 지적 호기심을 충분히 해소할 수 있을 것이다.


| 지은이의 말 |
감사의 말(page 5 ~ page 8) 중에서
무(無, nothing)는 글로 표현하기에 매우 어려운 주제이다. 한편으로 무는 한계가 없어서 한자리에 머물지 않고 모든 것에 스며든다. 또 한편으로는 흐물흐물하고 비물질적이어서 확실한 모습을 볼 수 없다. 무를 이해하려고 하면, 그것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고 싶어지고 그것으로 말장난을 하고 싶다는 유혹에 빠진다. 또는 자신의 생각 속에서만 끝없이 헤매거나, 고대 역사의 흥미로운 사실 따위에 빠져들기 쉽다. 물론 이런 일도 즐겁긴 하겠지만, 자칫 잘못하면 목적 없는 일이 될 수도 있다.

이러한 유혹을 피하려고 노력했지만 어느 정도는 실패했기에 독자들의 양해를 구하고 싶다. 어쨌든 나는 이 책에서 무에 대해 뭔가 말했다고 생각한다. 무가 중요하다는 것을 독자들이 최소한 깨닫기만 한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다. 무가 없이는 현대 물리학과 수학을 이해하기가 매우 어렵다. 세계를 인식하고 탐구하기 위해 우리가 이용하는 인간의 마음은 무라는 개념과 긴밀하게 얽혀 있어서, 마음은 손쉽게 무에서 유(有)를 만들어내고, 반대로 유에서 무를 만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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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 C. Cole


어쩌면 나는 20여 년 전 한 학술 모임에서 물리학자들이 실제적이고 매우 중요한 현상을 ‘진공’이라고 아무렇게나 말하는 것을 들었을 때부터 줄곧 무에 대한 글을 써왔다고 할 수 있다. 그 후로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의 물리학 저술가로서 이 주제를 탐구해 왔다. 이 책을 쓸 수 있도록 기회와 시간을 준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에 감사한다. 특히 편집인 그린버그(J. Greenberg)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 중략 ……

나는 이 책에서 많은 양의 기초 지식을 그것을 제안한 공헌자들을 밝히지 않고 아이디어를 중심으로 설명했다. 중요한 역사적 시기와 지적 발전 단계를 빠르게 훑어보기 위해 생략한 것도 적지 않다. 이렇게 빠진 것들에 대해서는 그 주제를 가장 잘 다룬 문헌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을 잡고 문헌에 열거했다. 다행히도 뛰어난 책이 여러 권 있다. 예를 들면 끈이론에서는 그린(B. Greene), 우주론에서는 구스(A. Guth), 일반상대론에는 킵 손(K. Thome)의 책이 대단히 뛰어나다.

…… 후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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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 C. 콜은 우아하고 유머러스하며 풍부한 재주를 지니고 있는 과학 컬럼니스트이다. 그녀는 우주론에서 입자물리학을 지나 끈이론까지 흐르는, 장대하고 생생한 현대 물리학 여행으로 독자들을 이끈다. 우리는 모든 길이 결국 ‘무(無)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우주의 구멍』은 우리 시대의 가장 근본적인 과학 문제들에 대한 흥미롭고 즐거운 탐험이다.
― 브라이언 그린, 『엘러건트 유니버스』 저자

뛰어난 책이다. K. C. 콜은 원자 속과 우주 밖의 신기한 세상에 파견된 우리의 외교관이다. 그녀는 이상한 물질들로 구성된 11차원 속에서 연관성을 발견하였으며, 거기에서 유머까지 찾아냈다.
― 데이바 소벨, 『경도』 『갈릴레오의 딸』 저자

‘무’라는 개념을 깊이 있으면서도 가볍고 쉽게 탐색한 K. C. 콜은 다양한 방면에서 조예가 깊다. 그녀는 우주론자나 물리학자, 신경학자, 심리학자, 예술가, 심지어는 신비가들이 무의 생산적이고 불가결한 가치를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보여준다.
― 올리버 색스, 『색맹의 섬』 저자


| 논평 |
우주! 어떻게 생겨나 어디로 가는가
팽팽하게 긴장된 수평을 유지한 채 흔들리지 않는 수평 막대저울이 있다고 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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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런 수평관계에서 왼쪽에 아주 작은 먼지라도 쌓이면 막대는 그 쪽으로 기울게 될 것이다. 그러면 얼른 오른쪽에 그 먼지 질량에 해당하는 추를 얹어놓아 수평을 유지시키려고 했는데, 너무 무거웠는지 다시 오른쪽이 기울게 되었다. 또 다시 왼쪽에 적당한 크기의 추를 올려놓아 수평을 맞추려고 한다. 이렇게 수평막대는 계속 아래위로 움직이겠지만 여전히 그 수평을 깨지는 않고 있다. 즉 한쪽 막대가 땅에 닿지 않는 한, 수평막대가 계속 흔들거려도 수평은 수평이라는 말이다.

이와 같이 수평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전자처럼 흔들리지 않고 긴장을 유지하는 수평과 후자처럼 조금씩 요동이 있지만 여전히 수평을 유지하는 흔들리는 수평이다. 전자의 수평을 우리는 무(無)에 유비할 수 있다. 일체의 흔들림이 없던 무의 수평은 먼지와 같은 아주 작은 외부간섭으로부터 시작되는 요동에 의해 양쪽 수평막대 끝에서 위치에너지와 운동에너지의 발생을 끊임없이 생산한다. 수평막대의 위아래 요동은 물리적으로 말한다면 곧 위치에너지와 운동에너지의 교환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요동하지만 일시적으로 수평을 유지하는 한쪽 끝에서 볼 때 위치에너지와 운동에너지는 서로 교환이 된다. 쉽게 말해서 합이 영(0)이라는 뜻이다. 그렇지만 에너지가 일단 발생했다는 점에서 에너지는 요동하면 할수록 계속해서 무한히 늘어만 간다. 다른 쪽 끝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결국 한쪽 수평막대가 한번 진동하면서도 아슬아슬한 수평을 유지한다면 무에서부터 수사적인 차원에서 4배수의 양(+)의 에너지가 발생하는 셈이다. 한편 한쪽 끝의 양의 위치에너지는 비록 가상적 혹은 논리적이기는 하지만 다른 쪽 끝의 음의 위치 에너지를 수반한다. 음의 에너지는 실제로 생각하기 어렵지만, 전체로 보면 에너지의 합이 영이 된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이상은 이 책 전반에 흐르는 무에 관한 사유구조를 수평 막대저울이라는 단순한 이야기로 바꾸어 말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이 책은 우주의 탄생이 어떻게 이루어졌으며 앞으로 우주는 어떻게 진화할 것인가에 관한 내용을 비교적 쉽게 설명해주고 있다. 130억 년 전 오늘과 같은 우주 탄생을 가져다 준 빅뱅은 거의 무와 같은 존재인 최초의 알갱이로부터 터졌을 것이다. 이 책을 잘 읽으면 그것은 무에서 유가 탄생된 것이 결코 아님을 알 수 있다. 단지 보이지 않는 유에서 보이는 유로 전환되는 사건일 뿐이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유를 무라고 말할 뿐이다. 보이는(혹은 보일 수 있는) 유는 보이지 않는 유에 의해서 상쇄되며 따라서 우리는 그 에너지의 합이 영으로 보존된다고 말한다. 무는 이러한 보존성을 일러 말하기도 한다.

이러한 사유방식은 미래의 우주가 더 커질지 아니면 작아질지를 결정하는 암흑물질의 존재를 추정할 수 있게 해준다. 두 물체가 어느 일정 거리 안으로 서로 붙어 있으면 그들 사이의 인력 때문에 덜커덕 붙어 버릴 것이다. 그러나 일정 거리 밖에 놓이면 이내 더 멀리 떨어지게 된다. 그래서 우주 물질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으면 결국 우주는 축소할 것이고 성기게 퍼져 있으면 우주는 팽창할 것이라는 생각은 상식에 속한다. 이런 상식을 근거로 보이지 않는 우주물질들 즉 암흑물질의 존재를 필연적으로 상정할 수밖에 없으며, 비록 중력효과만을 갖는 암흑물질은 보이는 것이 모두가 아니라는 사실을 강하게 추론한다. 그리고 보이는 것만을 유라고 하는 것은 유의 한계를 스스로 인정하는 셈이다. 이는 추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올해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연구주제인 중성미자가 바로 암흑물질의 강한 후보임을 고려할 때 무에 대한 경험적 접근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다.

논리학에서는 여자와 남자 혹은 A와 ~A는 모순관계이면서 동시에 보집합의 관계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주계에서 무와 유는 모순관계가 아니라 포섭적 전환관계이다. 이 점은 이 책 전체의 요약이기도 하며, 동시에 저자가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우주의 형상이다. 그 안에는 무가 유를 낳지만 무에서 유가 창조된다는 것이 아니며, 보이는 유는 무의 한 단편이라는 생각이 아주 깊이 새겨져 있다. 그런데 불교를 좀 아는 이들이 이 책의 이런 전개내용을 따라가다 보면 놀라운 심장박동을 느끼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입자물리학과 우주물리학의 내용이 범어의 수냐에서 용수의 중론에까지, 화엄경에서 구사론까지, 하다 못해 송대의 벽암론이나 도가사상에 이르는 일련의 빔(空, 無)의 모습과 너무나 흡사하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외형적 유사성에 대한 놀라움과 기쁨에 빠져버리면 우리 현대 불교 또한 깊은 상처를 입게 될 수 있다. 왜냐고? 책의 저자가 9장에서 말한 부분을 따오자. “불교는 마음으로부터 시작하지만 물리학의 주요 관심사는 관찰대상이다.” 그리고 더 이상의 이유는 독자들이 이 책을 통해서 스스로 찾아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읽을 만한 책이었다.
― 최종덕/ 상지대 교수(과학철학)


| 칼럼 |
무로 돌아가야 우주가 열리나니 ‘우주의 구멍’

“이 무한한 공간의 영원한 침묵이 나는 두렵다.” 17세기 프랑스 철학자 파스칼은 자신의 사유를 모은 <팡세>에서 이렇게 읊조렸다. 끝없이 펼쳐진 텅 빈 우주의 고요가 이 병약한 사상가에게 공포감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그러나 현대의 물리학자에게 그의 고백은 우주의 본질과 무(아무것도 없음)의 실체를 이해하지 못한 자의 엉뚱한 두려움으로 생각될 것이다. 이들에게, 텅 빈 공간은 영원히 침묵하는 존재이기는커녕 “입자들이 추는 광란의 춤이고 포효하는 바다이며 끓어오르는 가마솥이고 용솟음치는 화산”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저명한 과학칼럼니스트 케이 시 콜이 쓴 <우주의 구멍>은 무, 곧 아무것도 없음이 과학적 사고의 역사에서 어떤 경로를 거쳐 진화·발전했으며 현대 물리학에 와서 과학적 난제를 푸는 열쇳말이 됐는지를 최근의 연구성과를 담아 풀어낸 책이다. 그의 책은 어려운 수식과 딱딱한 문장으로 일관하는 통상의 과학서와 달리 시적인 표현과 유머러스한 문체, 알아듣기 쉬운 예증을 두루 사용해 물리학에 관한 상식적 수준의 독자를 유혹한다.

무는 오늘날 거대한 우주를 연구대상으로 삼는 천체물리학과 극소물질의 세계를 다루는 미시물리학에서 모두 빼놓을 수 없는 중요 개념이 됐지만, 그것이 인간의 사고 영역 안에 확실히 포섭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가령, 수학에서 무를 나타내는 0이라는 관념은 기원 1세기께 인도와 마야에서 등장한 뒤 거의 1천년이 흐른 다음에야 수를 세는 단위의 일원으로 편입됐다.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에게 무는 존재의 결핍으로서, 사고를 혼란스럽게 하는 거추장스런 무엇이었다.

무란 무가치한 것이며 아무런 능동성도 없는 것이라는 생각은 셰익스피어의 비극 <리어왕>에서도 등장한다. 리어왕은 이렇게 말한다. “무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현대의 물리학자들은 이 생각을 정확히 반대로 뒤집었다. “무는 기준이고 유는 파생물이다. 유는 무가 변한 것이다. 어찌 보면 물리학의 역사는 무를 유로 바꾸고 유를 무로 바꾸어간 과정의 역사다.”

<우주의 구멍>은 생활세계의 상식을 뒤엎는 이런 발상이 물리학적 세계에서 어떻게 진실의 무게를 지니게 됐는지를 차근차근 설명해 보인다. ‘없음’이 ‘있음’의 어머니라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 지은이가 먼저 제시하는 것이 ‘마당’(장·필드)이라는 개념이다. 마당의 의미를 이해하는데 가장 쉬운 방법은 자석을 떠올리는 것이다. 자석 위에 쇳가루를 뿌리면 엔극과 에스극 사이에 형성된 자기장을 따라 쇳가루들이 줄을 지어 선다.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이 힘들의 분포가 마당(장, field)이다.

상대성이론의 창시자 아인슈타인은 “우리의 감각에 물질이라는 인상을 주는 것은 실제로, 비교적 작은 공간에 에너지가 엄청나게 축적된 것일 뿐이다”라고 했는데, 이런 관점에서 보면, 물질은 단순히 마당(장, field)의 힘이 어쩌다 집중된 곳일 뿐이다. 수증기가 맺혀서 물방울이 되듯이, 마당(장, field)이 맺혀서 물질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생각은 더 진전돼 우주 전체가 마당(장, field)이라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마당(장, field) 개념은 무와 유의 차이를 영구히 없애버린 거대한 사고의 혁명이었다.”

더 중요한 것은 입자와 반입자라는 대칭쌍 개념이다. 아무 것도 없는 빈 공간에서 전자가 튀어나오면, 그 자리에 구멍이 생기는데, 이게 반전자(양전자)다. 다시 말해, 하나의 입자가 무에서 태어나면 그 구멍, 곧 반입자도 똑같이 태어난다. “우주 전체에서는 모든 시간을 통해 입자와 반입자가 끊임없이 생겨난다.”

이렇게 생겨난 입자와 반입자는 똑같은 양이므로 그 둘을 평균한 전체 에너지는 ‘0’이 된다. 이것을 이해하는 쉬운 예가 번개다. 하루 종일 발생한 번개의 총에너지를 합하면, 음전하와 양전하는 상쇄돼 없어진다. “그러나 균형이 깨져서 불안정한 짧은 순간에 번개는 번쩍이면서 그렇게 아름다운 빛을 낸다.”

결국은, 이 거대한 우주도 입자와 반입자를 총합하면 무가 된다.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균형이 깨져 물질이 생겼지만, 그와 함께 생기는 반물질을 함께 계산하면 애초의 무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니까 무야말로 물리학적 무대의 중앙에 선 주인공인 셈이다.

지은이는 무의 균형이 처음으로 깨진 것이 우주의 시작인 빅뱅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문제는 남는다. 아무 것도 없는 상태의 균형이 깨지려면 어떤 최소한의 에너지가 무 안에 있어야 한다. 그래서 물리학자들은 빅뱅 이전의 무를 진정한 무가 아닌 가짜 무, 가짜 진공이라고 말한다. 그러면 왜 완전한 무가 아니고 무엇인가가 있는 무인가 그에 대한 대답은 “모른다”이다. 물리학은 풀어야 할 과제를 여전히 가득 안고 있다.

| 이미지 제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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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왼쪽부터>
1. 우주에 있는 검은 구멍(블랙홀)
2. 빈공간은 물체들에 의해 이리저리 흔들리고, 흔들리는 공간은 다시 물체를 흔든다. - 플라톤
3. 무에서 충분히 모든 것을 끌어낼 수가 있다. - 라이프니츠
4. 가진 것이 없다는 것은 금고 속에 넣어둔 돈이 빚과 같다는 것이다. - 아인슈타인

출처 - 한겨레신문 '책과사람' 칼럼 (고명섭 기자)



| 차례 |
· 감사의 말 Preface: Appreciations, Attributions, and Apologies

1장 왜 무인가 Chapter 1 Why Not? A Prelude
2장 무의 등장 Chapter 2 Nothing Happened
3장 혼란스러운 무 Chapter 3 Good for Nothing
4장 무대 중심에 선 무 Chapter 4 Nothing Takes Center Stage
5장 무대 중심이 된 무 Chapter 5 Nothing Becomes Center Stage
6장 무의 줄타기 Chapter 6 Nothing Gets Strung Out
7장 모든 것이 무에서 나온다 Chapter 7 Nothing Becomes Everything
8장 무소식이 희소식 Chapter 8 Nothing in the News
9장 마음속이 무 Chapter 9 Nothing on Your Mind
10장 무를 찾아서 Chapter 10 In Search of Nothing

· 도움 주신 분들 SUPPORTING CAST
· 참고 문헌
· 옮긴이의 말
· 인명 색인 INDEX

2007년 12월 2일 일요일

SF 용어 사전 (317 항목):SF Dictionary (317 Entries)


위에 첨부한 파일의 압축을 해제하면 아래의 4가지 파일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SF 용어사전 (317 항목).html / SF 용어사전 (317 항목).txt
SF 용어사전 (317 항목-ㄱㄴㄷ순).gbs / SF 용어사전 (317 항목-항목별분류).gbs
(이 용어사전은 인터넷에서 받은 3가지 파일을 참조하여 재정리한 것입니다. 지속적으로 추가할 예정임)

| 내용을 상세하게 추가한 글 |
강화복(强化服) Powered armor
게임이론 Game Theory
레밍 현상 Lemming Suicide
로보토미 Lobotomy
로슈의 한계 Roche Limit
메타소설과 메타SF Metafiction & Meta SF
무 대륙 Mu(lost continent)
사이버 펑크 Cyberpunk
앤드로이드 Android
옴니 OMNI

| 새롭게 추가한 항목 |
*로봇공학의 0원칙 Zeroth Law of Robotics
*로봇공학의 3원칙 The Three Laws of Robotics ※ 기존에 있었는데 항목 구분이 안 되어 있어서 새롭게 추가한 것으로 간주하고, 상세글 추가함.
*롱샷 계획 Project Longshot
*멍청한 플롯 idiot plot
*반(反)지구 Counter Earth
*버서커 Berserker
*범종자설 Panspermia Hypothesis
*사변소설 Speculative Fiction
*안드로이드 Android:← 앤드로이드 Android를 보시오.
*양전자(陽電子) Positron
*외계인 침공 피해망상증 Invasion Paranoia

| 용어명 변경(X:기존용어명 제거했음) |
*이디옷 플롯 idiot plot(X) -> 멍청한 플롯 idiot plot 으로 변경하고 상세글 추가.
*범정자설(X) -> 범종자설 Panspermia Hypothesis 로 변경하고 상세글 추가.

※ 한국식 용어 표현으로 변경가능한 것은 하나씩 영어식 용어를 자제하고, 변경해나갈 계획임.
※ 오타와 잘못된 용어명 변경해나가겠음.
※ 이번에 추가하거나, 상세하게 정리된 항목들은 네이버의 '안드로이드 카페'의 '고장원'님이 올리고 계신 『SF용어 해설』을 참고한 것임을 밝혀둡니다. 따로 허락은 받지 않았습니다. (괜찮겠죠. 제가 이 블로그에서 돈벌이에 이용하고 있는 것도 아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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