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월 3일 토요일

잡념에 먹히는 밤이 무섭다.

난 무섭다.

결론이 무섭고,
이유가 무섭고,
일반론이 무섭고,
삼단논법이 무섭고,
이분법이 무섭고,
자본이 무섭고,
사상이 무섭고,
중독이 무섭고,
철학이 무섭고,
공상이 무섭고,
·
·
·
·
인간이 무섭다.

어느 때, 어느 곳에선가
누군가가 퍼뜨린 모든 유언비어들···
한 사람의 어리석은 판단이 만들어 낸 정신의 바이러스가 시공을 넘어 지금 내 머리 속 깊은 곳 어딘가에 둥지를 틀고 앉아서 내 허락 없이 무전취식하고 있는 것이 무섭다.

부지불식간에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내 생각과 내 몸을 지배하고 나에게 지시하고 명령하는 관념들.
그 관념들은 내 생체 에너지를 취하고 그 힘으로 나를 움직이게 한다. 나는 그런 관념들의 숙주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 이 글에 나타날 명사, 형용사... 등은 대체 어느 때, 어느 곳의 누가 생각했던 것들일까? 생각들은 잠시도 나를 가만히 내버려두질 않는다. 요즘 난 생각들에 점령당했다! 아니 야금야금 먹히고 있는 것 같다.

사람들은 흔히 자신의 의지대로 생각하고, 행위하며 산다고 여기지만,
어쩌면 우리의 정신 저 깊은 밑바닥 어딘가에 가상의 매트릭스가 있어,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만들어내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쩌면 매 순간을 관념 속에 깃든 절대자가 내 생각과 행동들을 프로그래밍하고 통제하고 있을지도....

만약에 영화 "이너스페이스 Innerspace(1987)"에서 처럼 극소화 될 수 있다면, 아니 그 보다 더 작은 소립자인 쿼크 quark 입자로 작아질 수 있다면 인간의 머리 속으로 들어가 그 소우주를 유영해보고 싶다. 두뇌 속에 흐르는 전기 신호의 교차로에 서서 그 생각의 흐름들을 교통정리 해보고 싶다.
 
어쩌면 신은 우주 만물을 창조하고 만물의 정신 속으로 숨어든 게 아닐까?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런데 지금 또 그런 생각이 떠오른다.

현대물리학자들이 말하길 물질을 쪼개고 쪼개고... 극한까지 쪼개고 들어가면 물질은 사라지고 결국은 진공만 남는다고 한다. 이 말은 물질이란 결국 진공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말이고, 이 말을 뒤틀면 물질은 진공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간단히 단정적으로 표현하면 무에서 유가 만들어졌다고 유추할 수 있지 않을까?

물리학자들이 말하길 무란 개념은 우리가 머리 속으로 떠올리는 관념적인 없음의 상태가 아니라 진공의 개념이라고 한다.
진공이란 하나의 사건이 발생할 가능성의 상태이고 운동성의 상태이지, 정적인 상태가 아니다.
현대물리학에서 얘기하는 우주의 모습은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무위)자연과 닿아 있다.

노자에서 얘기하는 자연이란 우리가 일상에서 얘기하고 생각하는 자연이 아니라 "스스로 그러함"이라고 풀이한다.
노자의 자연이 "스스로 그러함"이라고 가정하면 그것은 결국은 우주의 모습과 닮아있다 하겠다.

우주의 창조와 변화의 과정은 "스스로 그러하게 조직화 되어있다." (이건 어쩌면 운명론일지도 모르겠다.)
진공에서 스스로 그러하게 스스로 그러한 과정을 거쳐 지금의 모습으로 되어있으며, 앞으로도 스스로 그러하게 되어갈 것이다.
‘스스로 구현되는 우주 The Universe That Discovered Itself’ 속에서 우리는 오늘을 살고 있고, 우리의 자손들 또한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우리는 우주의 일부이지만, 우리를 이루는 모든 것은 우주와 닮은꼴이다.

어쩌면 생각이란 것은 "스스로 그러하게" 흘러가는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는 마음만 바꾸면 뭔가를 바꿀 수 있다 생각하고, 노력하여 열심히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이미 그 시초와 끝은 그러한 과정을 거치도록 이미 프로그래밍화 되어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매트릭스의 네오가 생각나는군...) 어쩌면 나는 의식적인 생각과는 반대로 무의식적 운명론자거나 결정론자인지도 모르겠다.

‘내부 세계와 외부 세계 사이 Between Inner Space and Outer Space’ 생각의 간극에 도사리고 있는 것의 실체에 대한 이 끝없는 생각은 정말 말 그대로 끝이 없으므로 다음 기회로 생각을 미뤄둬야겠다.

나는 오늘 아침에 생각하길 저녁엔 "지난 주에 읽다만 책을 읽어야지"라고 생각했다. 아침에 품은 그 생각은 누구의 것이었으며, 칠흑빛이 세상을 온통 칠해버린 이 시간, 나에게 이런 생각의 오물을 타이핑하게 하는 것은 어느 때 누구의 지시일까?


이와 같은 지리멸렬한 생각의 파편들.
어떤 이는 필자의 잡설을 보며 "이 사람 미쳤구나" 라는 지시를 받을 것이고,
또 어떤 이는 정신없어하며 다른 곳으로 이동하라는 행동을 지시받을 것이고,
또 다른 이는 데자뷰를 느끼고 있을 것이다.
텅 빈 이라면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아니 텅 빈 이라면 말 그대로 아무 판단도 하지 않고, 받아들이겠지.

"난 무섭다"라는 제목을 적어두고, 타이핑을 할까말까 망설였다.
하지만 어느 새
내 생각은
결론도 없고 '과정만 있는 결론'을 내리려 하고 있다. ‘역시 나 답다.’

언제나 그렇하듯이 내 생각은 진부하다.
글을 끄적일 때마다 항시 느끼는 것이지만 "결론이 있는 사고의 과정"은 진부하다.
하긴 진부하지 않다면 그건 이미 인간이 아닌 다른 그 무엇이겠지···
역시 뭔가의 종지부를 찍는다는 것.
결론을 낸다는 건 무섭다.

제임스 조이스 James Joyce가 존경스러운 밤.
피네간의 경야 Finnegans Wake가 읽고 싶은 밤에···
이 소설의 맨 마지막 단어는 정관사'the'이다. 시쳇말로 쩐다! 쩔어!


| 생각꺼리 |

이바구 하나 - 웹에서의 글읽기 습관에 대하여
[웹페이지, Scanning VS Reading]
세계 최초의 온라인 신문(1992년)인 <시카고 트리뷴>의 기사에서
제임스 조이스는 <피네간의 경야>에서 극단적인 비선형적 글쓰기의 전형을 보여준다. 웹의 하이퍼링크처럼.

"제이콥 닐슨"에 따르면 새로운 페이지를 보는 사람들의 79%가 페이지를 스캐닝 scanning 할 따름이고, 16% 정도만이 진지하게 읽기 reading을 한다고 말한다. 또한 대다수는 각 문단의 첫 문장만 읽는 경향이 있다.
제이콥 닐슨 왈(曰) '한 문단에는 한 개의 아이디어만 담아라.'
포털 뉴스가 기존 미디어를 압도하는 측면은 내용이 아니라 '전달 능력'이다.

- 인터넷신문과 온라인 스토리텔링 | 김익현 | 커뮤니케이션북스 에서 발췌


이바구 둘 - 쿼크 quark에 대하여
쿼크라는 이름은 겔만이 J. 조이스의 소설 《피네간의 경야(經夜)》의 한 구절인 <Three quarks for Muster Mark>에서 따온 것으로서 쿼크라는 단어의 의미는 "바다 갈매기의 울음소리"란다. 아무런 의미가 없는 단어이다. 바다 갈매기의 울음소리를 인간이 이해할 수는 없으니, 아무 의미가 없달 수 밖에…


이바구 셋 - 제임스 조이스 James Joyce에 대하여
아일랜드를 대표한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닌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 1882-1941)는 고향 더블린을 떠나 37년간이나 망명 생활(生活)을 하며 유럽각지에서 작품을 발표했는데, 작품의 대부분이 아일랜드인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1907년 시집 <실내악>에 이어 단편집 <더블린 사람들>을 출간하고, 자신의 삶과 비슷한 내용을 다룬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발표했다.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서 '의식의 흐름' 기법을 도입, 큰 효과를 거두었으며, 이후 <율리시즈> 에서도 '의식의 흐름' 기법을 추구하였다.

<율리시즈> 는 의식의 흐름과 내면의 독백 기법을 구사하고 있으며 버지니아 울프, 윌리엄 포크너등 다른 작가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친 현대 소설의 최고봉으로 평가받고 있다.

<피네간의 경야(經夜)(finnegans wake)>는 60여개 언어가 동원되고 가능한 모든 기법과 문체, 신조어가 실험된 장대한 드라마로 인류의 언어를 경신했다는 평을 듣는 작품이다.

누군가 <율리시즈>가 재미있냐고 묻는다면
"지루하기 짝이 없다"고도, 무엇과도 견줄 수 없을 만큼 "엄청 재미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글을 읽음에 있어 줄거리나 사건의 흐름으로 읽는 사람에게 <율리시즈>는 말 그대로 꿈 속으로 "율리시즈"를 만나러 가는 배가 될 것이고, 글을 쓴 저자나 화자의 내면을 항해하거나 화자와 대화하는 성향이 있는 독자라면 <율리시즈>에서 무한한 가능성을 발견한 기쁨에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고 싶을 것이다. 타인의 마음 속을 탐색하는 것이 어찌 쉽기야 하겠냐마는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며 부대끼는 수 많은 사람들과 마음의 소통이 원활하길 원하듯이 독서도 그렇게 해야하지 않을까? 시간은 좀 잡아먹히겠지만서도... 배 고픈가? 왜 자꾸 먹는 얘기가 나오는 걸까? 얘기가 또 삼천포로 빠졌다. ㅎㅎ


이바구 넷 - 이분법에 대하여
[두 겹의 우주라는 아이디어]
사람들이 우주를 이해하기 위해 고안해 낸 아이디어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우주를 2개로 나누자는 아이디어였을 것이다. 사람들은 통일성을 찾는다. 즉 다른 정보와 맞춰 봄으로써 자신이 자각한 것을 이해한다는 느낌을 갖게 되길 원하는 것이다. 사상의 역사에서 꾸준히 반복된 주제 중 하나는 우주에 대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정보를 설명할 수 있는 보편적인 패턴 - 의미 있는 틀 - 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아는 한 사람들이 생각해 낸 첫 번째 틀은 이분법이었다.(전통적으로 이원론이라고 불린다. 하지만 혼란스럽게도 이 명칭은 다른 아이디어들을 설명할 때에도 사용된다.)

이분법은 두 겹의 우주를 상상한다. 충분히 대칭적이고, 따라서 규칙적인 두 우주를 상상한다. 이 두 우주는 서로 균형을 이루고 있으며 2개의 모순되거나 상보적인 원리에 따라 조절된다. 고대 이집트와 수메르의 창조 신화를 포함한 몇몇 원시 창조 신화들은 세계를 하늘과 땅 사이에 이루어진 생식 행위의 결과물로 본다. 이 아이디어는 아마도 문자로 남겨지기 오래전에 등장했을 것이다. 사실 인류학자들은 우주에 대한 수많은 상충되는 설명을 찾아 냈는데, 그 결과를 보면 많은 - 어쩌면 대부분의 - 사람들은 오늘날에도 그들의 가장 먼 조상들이 상상한 두 겹의 우주 속에서 살고 있는 것 같다. 두 겹의 우주는 '남자'와 '여자', '빛'과 '어둠', '선'과 '악' 같은 상호 보완하는 세계이다. 예전에는, 빙하기 유럽의 동굴 벽화를 이분법적 정신세계에 대한 증거로 해석한 학자들이 있었다. 사냥꾼들은 모든 사물을 남녀의 성별로 분류되는 세계로 보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학자들이 남근이나 여근의 상징이라고 파악한 대상들은 단지 무기나 발자국일 수도 있고, 아니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기호 체계의 일부일 가능성도 있다.

이분법은 그것을 믿는 사람들의 미신적인 통념과 윤리 의식을 결정한다. 이 아이디어는 지난 3,000년 동안 더 최근에 등장한 사유 체계에 의해 부정당해 왔다. 하지만 도가의 음양 사상은 예외에 속한다. 도가 사상은 중국을 비롯하여 세계 여러 지역의 사상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 왔다. 기독교는 비록 형식상으로는 이분법을 부정했지만 이분법의 상당 부분을 흡수했다. 거기에는 '어둠'의 사악한 힘과 '빛'의 선한 힘이 영원히 투쟁한다는 관념, 또는 상상이 포함되어 있다. 17세기 이항 정리의 발견자인 라이프니츠에게 있어서 의심의 여지없이 존재하는 실재는 세상에 딱 두 가지밖에 없었다. 즉 0과 신 神이었다.

- 세계를 바꾼 아이디어 | 펠리페 페르난데스아르메스토 | 사이언스 북스 (p46~p47)에서 발췌

졸려서 이만... 안드로메다로 이동함. 지구인들이 귀양 보낸 개념 정리하러 ^^;
줄린 상태에서 끈적인 흔적들(부적절한 어휘, 엉터리 예, 오타 등)이 눈에 띄어 수정 삭제함!
(오후 9:19 2009-01-03)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