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9월 10일 월요일

지하 3층 The Third Level:잭 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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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 3층

The Third Lev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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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 피니

Jack Finney
박상준 옮김
행복이란 지나간 시대에, 아주 오랜 옛날에 놓쳐버린 환상으로만 여겨질 때가 가끔 있다. 무릉도원, 또는 에덴의 동산, 아니면 소박하게 할머니 할아버지가 사시던 그 옛날의 마을로 돌아가보고픈 부질없는 충동이 간혹 솟구친다. 하루가 다르게 발달하는 과학과 기술은 우리를 사정없이 미래로 이끌어가고 있지만, 결국은 우리 생활의 일부로 녹아들어 오는 그 발달된 문명 자체가 보다 단순하고 소박했던 지난날을 그리워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만약 신이 우리가 하늘을 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다면, 우리는 기차나 자동차 따위를 발명하지 못했을 것이다.' 무질서하게 도시의 확장이 진행되던 시절, 그리고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시절에 씌어진 이 인상적인 SF엘레지를 통해, 우리는 과거를 향한 향수의 한 변질된 모습을 음미하게 된다. - 에릭 S. 랩킨(미시건대 영문과 교수)
(윗 글은 책에 없는 글입니다.)

뉴욕 센트랄역, 뉴욕역, 뉴 헤이븐역, 그리고 하트포드역의 역장들은 기차시간표를 걸고 맹세할 테지. 지하 2층 밖에 없다고. 그러나 그랜드 센트랄역에는 분명히 지하 3층이 있다구. 왜냐고? 바로 내가 거기에 가 봤거든. 정말이야, 지하 2층 밑에 3층이 있어. 내 친한 친구들중에 정신과 의사가 하나 있지. 그 친구와 상담하면서 그랜드 센트랄역에 지하 3층이 있더라고 얘길 해 주었더니, 그건 평소에 어렴풋이 바라던 소망을 허깨비로 본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거야. 나의 생활이 행복하지 못한 때문이라고 하더군. 그 소릴 듣자마자 마누라가 발끈하긴 했지만, 그 친구는 설명을 계속했지. 현대 세계는 불확실성과 공포, 전쟁, 갖가지 근심걱정, 뭐 그런 따위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내가 순간적으로 그런 세상에서 도피하고픈 충동을 느낀 것이라나?

그래, 좋다구. 누군들 안 그러겠어? 내가 아는 사람들은 죄다 이 골치아픈 세상에서 탈출하길 간절히 바라고 있다구, 사실이야. 그렇지만 그들 중에서 그랜드 센트랄역 안을 헤메다가 지하 3층에 가 봤다고 얘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그런데 하여튼 그건 허깨비라는 거야. 그 탈출하고픈 욕망때문에 생긴. 그리고 다른 친구들도 모두 내가 허깨비를 봤대. 그러면서 하나같이 지적하는 게 있었어. 예를 들어 내 취미중에 우표 수집하는 거, 그것도 잠시나마 현실 도피의 수단이 된다나? 그래, 그건 맞는 말일 수도 있지. 그렇지만 내 할아버지도 우표 수집을 즐기셨던 건 어떻게 설명할 거야? 그 시대에도 현실도피욕구를 채우자고 그랬겠어? 내가 듣기에 모든 것이 지금보다는 더 아름답고 평화로웠던 그 당시에 말이야. 내가 가진 우표들은 전부 할아버지가 수집하기 시작해서 내게 물려주신 거라구. 아주 훌륭한 것이지. 초창기의 희귀종들이 네 장씩 붙은 채로 모두 정리되어 있고 초일봉피도 많지. 그 밖에도 여러가지 값진 우표들이 많아. 자네도 알다시피 루즈벨트 대통령도 우표수집을 즐겼지 않나?

자, 아무튼 내가 그랜드 센트랄역에서 겪은 일을 이제부터 얘기해 줄게. 지난 여름날 어느 밤에 나는 좀 늦게까지 사무실에서 일하다가 퇴근했어. 집에 빨리 들어가려고 그랜드 센트랄역으로 갔지. 버스보다 지하철이 좀 빠르거든.

글쎄, 난 아직도 왜 그 일이 하필 나에게 일어났는지 도대체 모르겠어. 난 그저 찰리라는 이름을 가진 서른 한 살의 평범한 남자에 불과한데 말야. 그때 난 황갈색의 헐거운 셔츠를 입고 있었지. 머리에는 장식띠가 달린 밀짚모자를 쓰고 있었고. 그저 나같이 그렇고 그래 보이는 사람들을 열댓명 지나쳐 갔는데, 그때 무엇으로부터든 도피하려는 생각은 전혀 없었어. 그저 내 아내 루이자가 있는 집으로 빨리 가고 싶었을 뿐이야.

밴더빌트 거리를 돌아 그랜드 센트랄역으로 들어서자 곧 지하 1층으로 내려갔어. 자네도 기차탈 땐 언제나 내려가는 데잖아. 난 다시 계단을 통해 지하 2층으로 내려갔지. 거기가 교외로 나가는 지하철이 출발하는 곳이거든. 아치형의 입구에 지하철로 향한다는 팻말이 있길래 머리를 좀 수그리고 들어갔지. 그리고는 길을 잃어버린 거야. 근데 그럴 수도 있다구, 거기서는. 내가 그랜드 센트랄역을 드나든 건 수 백 번은 되지만, 그때마다 못보던 출입구며 계단이며 복도가 나오더라구. 한번은 일 마일 쯤 되는 터널을 따라 마냥 걷다보니 루즈벧트 호텔의 로비가 나오데? 또 세 블록이나 떨어진 46번 거리의 어느 사무실 건물로 나온 적도 있었어.

나는 종종 그랜드 센트랄 역이 마치 나무뿌리가 뻗어나가듯이 새로운 지하 통로나 계단들을 만들어낸다고 생각하곤 하지. 누구든 길을 가면서도 지금 어디로 향하는지 아무도 알 수 없는 긴 터널들이 분명히 있을거야. 타임즈 광장으로 나가는 건지, 아니면 센트랄 공원으로 나가는지 종잡을 수 없게 말이야. 그리고 아마도 - 사실 꽤 많은 사람들이 그랜드 센트랄역의 미로를 여러가지 것들로부터 탈출하는 방편으로 삼지 - 내가 들어간 터널도 그렇게 해서... 하지만 난 이 생각은 그 정신과의사 친구에게 얘기하지 않았어.

내가 접어 든 복도는 왼쪽으로 꺾이더니 점점 아래쪽으로 내려가는 거야. 좀 이상하다고 여겼지만 계속 복도를 따라갔지. 들리는 건 내 발자국 소리 뿐이고 다른 사람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어. 그러다가 앞 쪽에서 뭔가 웡웡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더군.넓은 공간에서 사람들이 얘기를 나누는 소리가 복도에 울려 온 것이었지. 다시 길이 왼쪽으로 급하게 꺾이더니 짧은 계단이 나왔어. 거길 내려가니까 그랜드 센트랄 역의 지하 3층이 나타난 거야. 처음엔 다시 2층으로 되돌아온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매표소도 작고 매표창구나 플랫폼으로 나가는 출구들도 몇 군데 없어. 그리고 가운데 있는 안내 박스도 나무로 만들어져 있고 아주 고풍스런 모습이더라구. 게다가 그 안에 있는 남자는 녹색의 보안용 차양을 쓰고 팔에는 검은 색의 긴 토시를 끼고 있지 않겠어! 또 불빛은 어둡고 그나마 깜빡거리는 것 같더군. 그 이유는 곧 알게 됐지. 그건 가스등이었거든.

바닥엔 놋쇠로 만든 타구가 세워져 있었는데 그 건너편에서 뭔가 반짝거리는 것이 눈을 끌더군. 한 사나이가 조끼 주머니에서 금시계를 꺼낸거야. 그는 뚜껑을 열어제끼더니 시계를 흘끗 쳐다보곤 얼굴을 찌푸렸어. 꾀죄죄한 모자를 쓰고 단추가 넷 달린 검은 색 셔츠를 입고 있었지. 옷깃은 접혀 있었고. 그 사나이의 얼굴엔 커다랗고 검은 '여덟 팔'자의 수염이 나 있었어. 나는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았지. 모두들 1890년대 같은 복장을 하고 있는 거야. 내 생전 그렇게 많은 턱수염이며 귀 밑 구레나룻이며 잘 가꾼 콧수염들을 한꺼번에 본 적이 없었어. 그때 한 여자가 플랫폼에서 구내로 걸어 들어왔지. 그미는 삼각형 소매에다 스커트, 그리고 발목까지 단추가 달린 구두를 신고 있더군. 그 뒤로 플랫폼에 서 있는 기관차의 모습이 얼핏 보였는데 위에 굴뚝들이 줄지어 서 있는 '커리어 & 아이브스'의 아주 작은 모델이었어. 그때서야 상황을 깨닫게 되었지.

확인하기 위해 신문 파는 소년에게 다가가서 그의 발치에 놓인 신문더미를 슬쩍 바라보았어. '월드'신문 이더군. 그 신문은 폐간된지가 꽤 되었는데 말이야. 톱 기사는 클리브랜드 대통령에 관한 것이더군. 그 신문의 1면은 전에 시립도서관에서 본 적이 있었어. 그건 말이야, 1894년 6월 11일자 신문이었다네.

난 그곳(그랜드 센트랄 역의 지하 3층)에서 우리(루이자와 나)가 미국 어느 곳이든지 갈 수 있는 표를 구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매표창구로 갔네. 물론 1894년의 미국을 말하는 거지. 난 일리노이 주의 게일스버그로 가는 표를 두 장 끊고 싶었네.

게일그버그에 가본 적 있나? 아직도 그곳엔 낡고 커다란 목조가옥들과 넓은 잔디밭, 그리고 가지들이 지붕 위에서 서로 얽힌 굉장히 큰 나무들이 있는 멋진 고장이지. 1894년에는 여름날의 저녁이 두 배는 더 길었고, 사람들은 잔디밭에 둘러 앉아 남자들은 시가를 피우며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고, 여자들은 종려나무 잎 부채를 흔들고, 또 그들 주위엔 반딧불벌레들이 날아다니는, 그런 평화로운 세상이었어. 제 1차 세계 대전은 아직 20년이나남아 있고, 2차 대전은 40년이란 먼 미래에 있는, 그런 시대로 되돌아가고 싶었어... 루이자와 함께 말이야.

매표원은 요금을 계산했어. 그는 장식테가 달린 내 밀짚모자를 쳐다보았지만 어쨌든 요금을 계산했어. 내게는 편도 티켓 두 장을 살 수 있는 돈이 충분히 있었지. 그런데 내가 돈을 꺼내어 세고 난 뒤 고개를 드니까 매표원이 날 빤히 쳐다보고 있잖아. 내가 들고 있는 지폐를 보고는 고개를 젓는 거야.
"그건 돈이 아닙니다, 손님."
그는 계속 얘기했지.
"그리고 만약 제게서 돈을 빼앗으려 한다면 멀리 못 갈 겁니다."

그리고서 그는 옆에 놓인 현금 상자를 흘끗 쳐다보았어. 물론 돈은 옛날돈이었지. 지금 우리가 쓰는 것보다 한배 반 정도 크고 도안도 다른 모양이야. 난 돌아서서 재빨리 밖으로 나왔지. 아무리 1894년이 좋았던 시대라고 해도 교도소까지 기꺼워할 건 물론 아니니까.

그 다음엔 뻔하지. 똑 같은 길로 다시 가면 된다고 생각했으니까. 다음날 나는 점심시간에 은행에서 300달러를 인출해서 - 우리 부부가 가진 것의 거의 다였지 - 그 돈으로 전부 옛날돈을 샀지. (바로 이 사실이 내 정신과의사 친구가 걱정하는 부분이라네.) 화폐 취급하는 가게에서는 어디서든지 옛날돈을 살 수가 있어. 좀 웃돈을 얻어야 되긴 하지만. 300달러를 옛날돈으로 바꾸니 200달러가 좀 안되더군. 그래도 걱정하지는 않았어. 1894년에는 달걀 한 꾸러미에 13센트밖에 안 했거든.

그러나 그 전날 나를 그랜드 센트랄역의 지하 3층으로 인도해 준 그 복도를 아무리 해도 찾을 수가 없었어. 지금껏 수없이 찾아 헤멨지만 그날 밤 이후 다시는 못 찾았어.

루이자에게 이 얘길 모두 해 주었더니 상당히 걱정하면서 더 이상 찾아다니지 말라고 간곡히 말하더군. 그리고 얼마 뒤 나는 지하 3층을 찾는 일을 그만두었어. 난 다시 우표수집으로 돌아갔지. 그러나 요즘은 주말마다 우리 부부가 같이 그랜드 센트랄역의 지하 3층을 찾아다니고 있네. 왜냐구? 분명히 지하 3층이 존재한다는 분명한 증거를 갖고 있거든. 내 친구 샘 웨이너가 사라져버렸어! 아무도 그가 있는 곳을 모르지만, 난 좀 의혹을 품고 있다네. 샘은 도시에서 자랐거든. 내가 게일스버그에 대해서 이런저런 얘기들을 그에게 해주곤 했지. 난 사실 그곳에서 학교를 다녔어. 그는 늘 그 곳에 대한 인상이 참 좋다고 말했거든. 그래, 그가 있는 곳은 거기야. 1894년의 게일스버그.

자자, 들어 봐. 어느 날 밤 우표들을 갖고 법석을 떨다가 문득 그걸 발견한 거야. 아 저, 자네 '초일봉피' 아나 ? 새로운 우표가 나오면 수집가들은 그걸 사서 편지에 붙인다구. 우표가 나온 첫날에 그렇게 해서 자기들끼리 교환하는 거야. 거기 찍힌 소인이 날짜를 증명하지. 그런 편지봉투를 초일봉피라 그래. 그 편지는 개봉하는 게 아니야. 대개 백지를 넣으니까.
그날 밤, 내가 갖고 있는 오래 된 초일봉피들 중에서 특이한 것이 하나 눈에 띄었어. 내가 구한 적도 없고 구할 수도 없었을 것 같은 게 하나 있더라구. 그것은 누군가 게일스버그에 살던 사람이 나의 할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였어. 봉투에 적힌 주소가 그러했지. 봉투에 찍힌 소인은 1894년 7월 18일, 그러니까 그때부터 쭉 우리집에 있었던 거야. 그런데도 내가 그동안 한번도 주의깊게 안 봤던 거지. 우표는 6센트 짜리였고 엷은 갈색이었어. 가필드 대통령의 초상이 그려져 있는 것이었지. 그 편지는 곧바로 할아버지의 수집품 목록에 올라 여태까지 잠자고 있었던 거야. 내가 마침내 열어볼 때까지.

그 안에 있는 종이는 백지가 아니었어. 내용이 이러했지.
윌라드 거리 941 번지
일리노이주 게일스버그
1894년 7월 18일
찰리에게
난 자네가 옳았기를 빌었네. 그리고는 자네가 옳았음을 믿게 되었지. 찰리, 자네의 말은 사실이었어. 난 지하 3층을 찾아냈네! 지금 2주일째 이곳에서 지내고 있네. 지금 거리 아래 쪽 댈리네 집 있는데서 누군가 피아노를 치고 있구만. 그리고 모두들 베란다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어. 난 저녁에 파티에 초대받았네. 오늘은 레모네이드를 맛보게 될 거야. 찰리, 루이자, 어서들 와. 지하 3층을 찾을 때까지 계속 살펴보라구! 분명히 있어. 날 믿게!

편지의 서명은 샘의 것이었네.
내가 갔던 화폐상에서 알아낸 것도 있지. 샘이 옛날돈 800달러를 사 갔다는 거야. 그 돈이면 건초나, 사료, 그리고 곡물을 취급하는 사업을 시작하기에 충분하지. 그가 늘 말했거든. 자기가 정말 해보고 싶은 일이 그런 거라고 말이야. 그리고 1894년의 게일스버그에선 그가 원래 하던 일을 할래야 할 수도 없을 거야. 그 친구 원래 직업이 뭐였냐구? 아, 내가 얘기 안했던가? 샘은 정신과의사였어.
The End

출처 : 세계 SF 걸작선(고려원 미디어):p119 ~ p125

댓글 7개:

  1. 얼른 다음 단편을 보여달라! 달라! ㅡㅡ;



    안녕하세요...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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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현실부적응 - 2007/09/15 01:34
    오랜만에 오셨군요. ^^

    잘 지내시죠?

    뒤늦게 나마 세계 SF 걸작선에 대해 간단히 소개글 올렸습니다.

    다음 작품은 저녁에 올릴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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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 오랜만에 온 척 해야겠다..ㅎㅎ )

    그 동안은 잘 못지냈는데 이제 잘 지내보려구요..ㅠㅠ



    ^_____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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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현실부적응 - 2007/09/15 13:35
    남부 지방에서 부터 태풍님께서 왕래하신다더군요.

    아직 펜터하우스에 ^^; 거주하시나요..

    물조심, 벼락조심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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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네.. 아직.....;;



    그래픽카드가 한참전에 팬이 안돈다는 걸 확인하고도 방치했더니..

    이젠 한 30분정도 쓰면 깨져버린다는.. (살짝 탔어요...흑흑 ㅠㅠ)

    팬만 갈았으면 되었을것을 질러야할 상황이... 엉엉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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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현실부적응 - 2007/09/16 13:47
    30분이면 거의 뉴스 조금 훓어볼 정도의 시간이겠네요.

    느닷없이 인터넷 폐인분들에겐 중독 치료에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이닥치네요.;;



    지름신께서 빠른 시일내에 강림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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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댓글이 달린 글이라 이 글만 공개로 돌려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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